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뜨기 Jul 16. 2020

고샅을 아시나요?

골목길

해가 땅에 묻히고 뭇별이 하늘에 싹틀 즈음, 옆집 멍멍이가 괜스레 짖어대면 건넛마을의 검둥이도 덩달아 짖어댄다. 마치 산 위의 봉수군이 불을 피우며 적군의 소식을 전하듯 마을의 개들은 짖어대며 밤 소식을 전했다. 뒷산 등성마루에서부터 미끄러지며 마을을 덮친 땅거미는 보 둑에 냇물 고이듯 고샅에 켜켜이 쌓였다.


지붕 위로 솟은 굴뚝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듯 연기가 어슬렁거리며 피어오르면 하루를 마친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한다. 밥상을 물리면 어른들은 얘기꽃을 피우기 위해 사랑채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아이들은 어둠을 핑계 삼아 고샅을 기웃거린다. 은근슬쩍 달이라도 비친 날이면 고샅을 누비는 아이들의 밤놀이는 더욱 길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내 어릴 적의 시골 동네의 고샅 풍경이다.


그때 동네 골목은 세상의 전부였고, 골목 안에선 모든 것이 다 통했다. 더 멀리, 더 넓은 세상이 필요 없었다. 골목길 담벼락에서 딱지치기로 딴 지저분한 딱지는 돈보다 더 소중했고, 골목 한구석에서 땅따먹기로 차지한 두세 발짝의 자투리가 아파트보다도 더 듬직했다. 씨껍질 안의 싹이 장차 큰 나무이듯 동네의 골목은 온 세상의 본보기였다. 골목대장은 왕이고, 골목 규칙은 세상의 법이었다.


소라게가 점차 자라면서 껍데기를 바꿔 새 집을 삼듯이 꼬마가 자라면 학생이 되어 학교를 다니게 된다. 마을 앞 안산을 에도는 마을길을 벗어나면 한길이 나타난다. 한길은 골목길과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반듯하다. 한길을 통해 학교를 가고 장터를 가고 도회지로 간다. 하지만 한길은 집들이 있는 마을로 빠르게 오가는 통로일 뿐 느긋하게 거닐며 이웃을 살피거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심장에서 나온 피는 대동맥과 소동맥을 거쳐 그물맥 같은 모세혈관에서 산소와 양분을 내놓고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거둔다. 사람들은 실핏줄 같은 고샅에서 안부를 전하고 온정을 쌓으며 생활을 품앗이한다. 마을 고샅은 한길 같은 대동맥이 아니다. 생활을 나누고 관계를 이어주는 모세혈관이다.

그러므로 고샅에는 마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고샅에는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말과, 객지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고대하는 마음과, 정든 임의 집을 기웃거리며 서성이는 연인의 애틋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마을에 들어오는 이삿짐도 고샅길로 들어오고, 함진아비의 실랑이도 고샅에서 벌어진다.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자습하다가 혼자 집으로 향하는 십리 길은 만만찮은 담력이 필요하다. 몇 고개를 넘고 몇 마을을 지나는 동안 머리 위에서는 온갖 무서운 얘기들이 맴돌고, 눈 앞에서는 어둠 속에 있는 나무와 비석들이 허깨비로 보인다. 야산에는 뭔가가 숨어서 나를 노리는 것 같아 머뭇거리다가도,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아 부리나케 달리면서 드디어 마을 어귀에 이르면 무섬은 이내 사라진다. 고샅에 들어서면 이제 혼자가 아니다. 혹 깡패나 도깨비가 나타나더라도 소리만 지르면 동네 형과 이웃 아저씨가 금방 달려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도시를 세울 때 산은 깎고 골은 메워 터를 평평하게 한다. 도시에 낸 길은 가로 세로 죽죽 그어 그야말로 바둑판 모양새다. 시골의 자연부락은 비스듬한 터에 그대로 자리하고, 골목의 선은 부드럽다. 시골마을의 모양은 마치 아름드리나무 같다. 밑둥치는 마을 어귀고, 굵직한 원가지와 가느다란 잔가지는 마을 고샅이다.

나무는 한 줄기 묘목이 자라면서 두세 가지의 1차 가지가 생기고, 이 1차 가지에서 다시 서너 가지의 2차 가지가 생기며 햇빛과 바람 등을 고려하여 나무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시골마을도 나무 모양처럼 지형과 방향과 우물의 위치 등에 따라 집들이 자리하고 고샅이 생긴다.


지금은 인위적인 환경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면서 마을 골목도 인위적으로 바뀌어간다. 규격화된 상품이 관리상 편리하듯 규격화된 마을도 생활상 편리하다. 그런데 난 왠지 예전의 구불구불한 자연부락 고샅이 그립다. 예전엔 물길 따라 길이 나고 마을이 생겼다. 문득 '물 흐르듯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간다. 시골마을은 물 흐르듯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집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봤고, 고샅은 도랑처럼 구불하다. 반면 도시의 집(아파트)이 같은 단지 내에서도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하고 길은 굴곡 없이 반듯하다.


사는 곳에 따라 사람의 성품도 변하는가 보다. 같은 방향을 보며 사는 시골사람들은 두레나 울력 등을 통해 뜻과 힘을 모아 마을일을 공동으로 처리하지만 다른 방향을 보며 사는 아파트의 주민들은 생각도 제각각이라 좀체 뜻을 모으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아파트에 사는 적잖은 이들이 예전에는 시골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나도 지금 아파트에 산다. 명절이면 시골을 찾지만 내가 찾는 고샅의 풍경의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었고, 들일을 나서는 힘찬 농부의 발길 대신 지팡이를 짚는 노인의 지친 발길만 남았다.


마을 앞 안산에서 고향마을을 바라보니 가을나무 꼴이다. 여름날의 무성한 잎사귀 대신 빛바랜 몇몇의 나뭇잎만 나뭇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는 풍경이다. 사람이 있어야 생기가 있고 문화가 있는데, 지금 시골에는 생기가 사라지고 전통의 문화마저 맥이 끊어지고 있다.


마을 고샅에 들어섰다. 지금은 낯설지만 예전에 낯익은 풍경이 떠오른다. 담벼락의 낙서, 허물어진 흙담, 부러진 당산나무. 이들은 내 유년의 추억으로 인생의 나이테에 새겨진 것들이다. 돌이켜 볼 수 있는 것은 체험한 것에 한해서다. 변화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며, 내 안에 새겨진 유년의 고샅을 돌이켜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