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지인의 집인 김천을 갔다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아내는 차를 타면 바로 자거나 핸드폰을 본다. 이따금 눈을 뜨고 무안한 듯 말을 건네기도 한다. 난 고분고분한 기사처럼 운전만 한다. 문경 IC를 지나처 올라가는데 '문경새재' 이정표가 보였다. 잠자던 아내가 눈을 뜨더니 반갑게 말했다.
"아, 문경새재 문단세다!"
"?"
유행가 가사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나도 귀에 익은지라 뭘까 생각했다. 떠오른 것은 문단세다. 국사 수업 시간에 암기했던 조선시대 왕의 순서를 앞 자만 따서 이은 말이었다.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효영 숙경영
정순헌철 고순
아내는 분명 이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사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들어 본 직한 단어를 보고 생각난 것을 툭 던진 것이다. 들어보니 '태정태세 문단세'나 '문경새재 문단세'가 비슷했다.
난 무식한 아내에게 그른 것을 올바로 바로잡아 주었다. 그건 조선시대 임금들의 앞 자만 이어서 하는 말인데, '문경새재 문단세'가 아니고 '태정태세 문단세'라고. 그러자 아내 왈
"그래? 아니면 말고!"
그러더니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아내는 지나가는 말로 했던 것 같다. 내가 그것도 모르냐고 하니, 아내는 자기도 다 아는데 내가 운전하는데 지루할까 봐 웃겨주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천연덕스런 변명이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스러워 그럴듯했다.
추측건데 아내는 모른다. 만약 안다면 '태정태세 문단세' 다음의 '예성연중 인명선'이 이어져야 할 텐데 다음 말이 없다. 더 다그칠 수 없었다. 그냥 아내는 무식한 거라고 합리적인 의심만 품었다. 일부러 그랬다면 아내는 대단한 연기자다.
저녁식사를 한 후 날이 어두워지고 공기도 선선해지면 운동 삼아 강둑길을 걷는다. 양평의 남한강 강둑길은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길 양편에 벚나무가 줄지어 심겨 있어서 봄날엔 벚꽃길이고, 여름엔 비탈에 금계국이 빈틈없이 피어 금보자기를 펼친 듯하다. 밤에 운동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로등이 켜져 있다. 가로등 주변엔 하루살이가 맴돌고 있었다.
아내는 하루살이를 보더니
"여기 모기는 잘 먹어서 그런지 엄청 크네?"
"저거 모기 아니고 하루살인데!"
내 말에 잠깐 멈칫하던 아내가 말했다.
"알아, 하루살이!"
이어서 생각난 듯 아내는 말을 이었다.
"하루살이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라는 말도 있잖아."
"?"
무슨 소리지? 아내는 의기양양했다. 자기는 하루살이도 알고 속담도 아는 유식한 사람이란 걸 내게 알리고 싶은 듯했다. 어떡하지? 아내는 하룻강아지를 하루살이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잡아주기로 했다.
"여보, '하루살이 범 무서운 줄 모른다'가 아니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야."
아내는 이번에도 잠깐 생각한 듯하더니
"알아, 하룻강아지."
그러더니 오지도 않는 하루살이를 모기 쫓듯이 헛손질을 해댔다.
"근데, 왜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몰라?"
어쩐 일인지 아내가 궁금증을 가지고 물었다. 난 신나서 설명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은 경험이 없는 풋내기가 앞뒤 상황 파악도 못하고 철 모르고 함부로 덤빈다는 것을 말하는 거지. 근데 이 말은 잘못된 부분이 있어. 하룻강아지는 사실 하룻강아지가 아냐. 하룻강아지란 태어난 지 하루 된 강아지를 일컫는 말인데, 태어난 지 하루 된 강아지는 눈도 뜨지 못한 상태지. 그러니 호랑이가 나타나도 볼 수도 없어. 여기서 하룻강아지는 태어난 지 하루 된 강아지가 아니라 일 년 된 강아지를 말해. 소나 개 등 가축의 한 살을 하릅이라고 불렀지. 가축의 나이를 하릅, 두릅, 사릅, 나릅, 다솝, 여숩 이라고 불렀거든. 그러므로 하룻강아지는 하릅강아지가 변해서 하룻강아지로 불린......"
"됐고!"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은 아내의 날 선 칼에 단번에 잘렸다. 내 얘기는 까만 밤공기에 흔적 없이 흩어졌다. 아내는 이미 딴생각을 하는지 흥얼거리며 걸었다.
나는 가끔 알아두면 좋을 만한 상식들을 아내에게 설명한다. 수학 문제를 푼다면 풀이과정을 설명한 후 정답을 알려준다. 하지만 아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정답이다. 풀이과정은 필요 없다. 아내는 나의 설명을 '지나친 친절'이라며 매도한다. 그러면 나는 아내의 자존심을 건들며 대든다. 상식이 없으면 무식하다는 소리 듣게 된다고. 아내는 이내 받아친다. 맹한 것이 자기의 컨셉이며, 무식한 것도 하나의 매력이란다.
아내는 드라마를 무척 즐겨본다. 극 중에서 4차원의 여배우를 가리키더니 자기의 컨셉이 저 배우처럼 백치미(?)란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동화작가 고민영(서예지)을 보며 한 말이다.
드라마를 많이 봐서인지 아내는 상황판단이 빠르다. 그래서 필요 없어 보이는 것은 바로 '됐고'로 자른다. 이미 알고 있다는 거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그다음 장면을 곧잘 알아맞힌다. 마치 미리 본 것처럼. 그만큼 상황판단이 빠른 것이다.
드라마의 상황판단만 빠른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안다. 내 마음과 몸 상태를 꿰뚫어본다. 내가 두리번거리면 뭐를 찾고 있는 건지 알아맞힌다. 난 단지 두리번거렸는데 내가 뭘 원하는지 빤히 아는 것이다. 또 내가 엉거주춤하면 빨리 다녀오란다. 어딜? 화장실! 아내는 내 몸의 생리상태도 다 안다. 아내가 말하길, 자기는 부처님이고 나는 자기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란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아내의 말대로, 자기는 무식한 것이 아니고 무식한 컨셉이라고 한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무식한 아내가 아니라 무서운 아내다. 오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