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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05. 2020

너 누구니?

산파


봄볕은 흙속의 움을 올라오게 할 뿐만 아니라 방안의 나도 밖으로 나오도록 꼬드긴다. 봄바람엔 아직 찬기 묻어있지만 햇살은 온기 풀풀 넘친다. 산림조합 나무시장에서 묘목 두 그루를 사서 언덕배기 산집에 갔다. 지난가을 내린 낙엽은 제 나무 밑동에서 살랑거리다가 패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거죽은 스펀지케이크처럼 부드럽고 시루떡 팥고물처럼 푸석하다.


봄볕에 데워진 땅바닥은 겨우내 잠근 빗장을 풀고 흙속에 품었던 생명들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이젠 아이들을 밖에 내보내도 되겠다고 여긴 것이다. 삐죽삐죽 솟구치는 새싹들은 다 예쁘다. 처음엔 다 고만고만하여 누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차츰 떡잎을 드러내며 나름의 표정을 띠며 자란다.


외떡잎식물은 송곳처럼 한 잎 두 잎 뻗치고, 쌍떡잎식물은 두 손을 벌리듯 마주 자란다. 그렇게 자라는 식물을 보면 누가 누군지 알아보게 된다. 방학 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갑고 반갑다. 풀은 다리 대신 뿌리가 달렸기에 처음 디딘 자리에서 다시 나고 자란다. 여러해살이 풀이라면 뿌리내린 그 자리서 다시 싹이 나올 것이고, 씨앗 퍼트린 한해살이 풀이라도 한두 발짝 못 벗어난 언저리에서 새순이 나온다. 


원추리가 올라왔다. 반갑다. 수선화도 올라왔다. 역시나 반갑다. 여지없이 쑥도 나왔다. 어린 쑥이 예쁘긴 한데 반갑지는 않다. 환삼덩굴도 단풍잎 꼴의 작은 잎을 벌리며 올라왔다. 어리기에 귀엽게 봐줄 수도 있지만 난 싫다. 이 얘가 자라서 옆의 아이들을 또 얼마나 괴롭힐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어리지만 곱게 봐줄 수가 없다. 


낯선 싹이 보인다. 쪽파처럼 생겼지만 훨씬 작은 예닐곱의 잎이 총총 모여 났다. 못 보던 아이다. 

누구지?

 누구지? 저절로 왔을 리는 없고 누군가 심었을 아이 풀. 우렁각시 다녀가듯 나 몰래 동산바치 다녀갔나? 

다른 풀들은 해마다 그 자리에서 올라오는 것을 봤지만 이 싹은 처음 본다. 둘러보니 드문드문 같은 싹이 눈에 띈다. 누군가 분명 심은 거다. 한참을 생각했다. 그래도 모르겠다. 



집 뒤 산에다 산림조합에서 사 온 묘목을 심었다. 참나무와 소나무의 등살에 배겨 날지 모르겠다. 집 뒤에는 관목이 별로 없다. 넓은잎나무가 워낙 커서 햇빛을 가리는 바람에 작은 나무들이 기를 펴지 못해서다. 겨우 생강나무 몇몇과 국수나무가 좀 자랄 뿐이다. 나머진 공간이 휑하다. 낙엽만 수북하게 쌓여있다.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나길 바라며 묘목을 심고 뿌리 틈새에 꾹꾹 흙을 채우며 다독였다. 옆의 생강나무에게 사이좋게 지내라고 당부도 했다. 생강나무는 벌써 노란 꽃을 피웠다. 주변 나무들은 아직 잠을 자는지 깼는지 모른 듯 기척이 없는데, 생각나무는 꽃을 활짝 피며 반긴다. 비탈이 워낙 심해 바닥을 살피며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아까 마당에서 봤던 쪽파 같은 싹이 눈에 띈다. 옹기종기 모여 나왔다. 그제야 알았다. 작년 가을에 내가 심었었다. 지인에게 얻어와 심은 산파다. 



산파를 본 적은 없다. 작년 가을에 지인 농장에 갔을 때, 산파는 이미 졌고 종자로 쓸려고 캐 둔 비늘줄기만 봤다. 마늘처럼 생겼는데 더 가늘고 작다. 산집 뒤의 산비탈이 허전하여 꽃과 나무를 가꾸고 싶다고 하니 산파를 심어보라고 거저 주셨다. 산파는 이름 그대로 산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작년 가을에 집 앞 마당가에도 몇 알 심고 산에 듬성듬성 심었었다. 그리고 깜박했다. 


봄에 그가 첫 모습을 보여줬지만 난 그를 심은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고, 그를 보고도 누군지 몰라봤다.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 추운 겨울 낯선 곳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봄에 새싹을 내었는데, 자기를 심은 사람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미안하고 반갑다. 고맙고 대견하다. 가을에 산파가 폭죽처럼 꽃을 터뜨리면, 나는 호들갑을 떨며 반기겠다 약속했다. 잘 왔다 산파야. 잘 자라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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