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_담배나방
고추밭에 갔다. 바닥에 떨어진 고추 열매들이 제법 눈에 띈다. 못 쓸 열매다.
몹쓸 놈들!
고추를 떨군 이들에게 내뱉은 푸념이다. 몹쓸 놈이 떨군 못 쓸 고추를 하나하나 거뒀다. 물컹하게 썩어서 만지기가 꺼려진다. 속을 까 보니 씨 대신 똥이다. 정상적인 고추라면 안에 하얗고 오동통한 씨가 다닥다닥 붙어있을 텐데, 까맣게 썩은 속살이 흐물흐물하다. 도둑놈은 약 올리듯 똥만 남기도 사라졌다. 바나나를 까먹고 버린 껍질이 며칠 지나면 거무튀튀 뭉개지듯 그런 꼴이다. 똥 밟은 기분이다.
그놈을 찾았다. 담배나방이다.
고추밭에 웬 담배나방? 고추밭에 고추나방이 아닌 담배나방이 납시었다. 천방지축 악동처럼 담배나방은 이 고추 저 고추를 들쑤셨다. 축구장에 들어가서 제 집 안마당인 양 신나게 뛰노는 농구선수 같다. 고추밭에 왜 담배나방이 나타났을까?
생물의 이름은 그 생김새, 활동 장소, 먹는 먹이 등에 따라 붙여진다.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는 ‘솔나방’이고, 뽕잎 즙을 빨아먹는 흰 벌레는 ‘뽕나무이’다. 근데 고추를 먹는 나방은 왜 '고추나방'이 아니고 '담배나방'일까?
고추를 먹는 담배나방은 담배도 잘 먹는다. 고추, 담배, 토마토, 가지는 모두 가짓과 식물이다. 즉 서로 비슷비슷한 사촌지간이다. 솔잎을 먹는 송충이가 갈잎은 안 먹어도 잣잎은 먹는 것이 이상하지 않듯이, 담뱃잎을 먹는 담배나방이 고추 열매를 먹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
이름이 ‘담배나방’이라면 담배와 같은 가지과의 식물도 담배처럼 이 나방의 서식처이자 먹이일 수 있다는 생각은 무리가 아니다. ‘배추흰나비’의 서식처와 먹이는 배추뿐만 아니라 같은 배추과 식물인 양배추, 무, 청경채 등이다. 어떤 식물에서 처음, 자주, 많이 어떤 벌레가 보였기에 그 식물의 이름을 따서 벌레의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담배나방의 발생은 고추밭보다 담배밭이 더 많지만, 담배나방의 피해는 담배보다 고추가 더 심하다. 그 까닭은 담배는 잎이 피해를 보지만 고추는 열매가 피해를 당하기 때문이다. 담뱃잎이 피해를 보는 것은 도마뱀의 꼬리가 잘린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고추 열매가 피해를 보는 것은 손질하여 잘 말린 생선을 고양이가 훔쳐간 것과 같다.
담배나방은 한해에 세 번 발생하는데, 1차 발생은 담배에서 하고 2차는 고추로 옮겨서 발생하는 걸로 추정된다. 담배와 고추를 같이 재배하면 담배나방의 피해가 더 심하다. 예전에는 담배도 많이 재배했는데 지금은 담배는 보기 드문 반면에 고추는 들판의 밭과 집안의 텃밭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름은 담배나방이지만 가장 피해를 보는 작물은 고추가 되었다.
담배나방 알의 지름은 0.4mm고 모양은 둥글며 색깔은 유백색인데 깰 즈음엔 검은색으로 변한다. 애벌레는 처음에는 녹색이고 자라면서 옅은 녹색 바탕의 등 양쪽 가장자리에 흰 줄이 생기고 마디마다 검은 점이 보인다. 다 자란 크기는 400mm다. 어른벌레는 몸길이가 17mm고, 날개는 황갈색 바탕에 약간의 녹색 빛을 띠며, 앞날개에는 갈색의 물결무늬가 있다.
번데기 상태로 겨울나기를 한 후 6월에 어른벌레가 되어 300~400개의 알을 낳는데, 많은 경우에는 700개도 낳는다. 알 낳는 곳은 고추의 잎, 꽃, 과일 등이며, 하나씩 낳으므로 찾기가 쉽지 않다. 한해에 세 번 어른벌레가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6월 상순~하순, 두 번째는 7월 하순~8월 상순, 세 번째는 9월 상순이다. 한 세대당 기간은 30일 정도인데, 먹이나 온도 등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낮이 짧아지고 온도가 떨어지는 9월부터는 다 자란 애벌레가 흙 속에서 번데기가 되어 겨울나기를 한다.
담배나방 애벌레가 고추 열매 속으로 들어가서 종자를 먹기 시작하여 과육까지 갉아먹으면 껍질만 남아 하얗게 마르거나, 뚫고 들어간 구멍으로 빗물이 들어가서 병균에 감염되면 무름병이 발생하여 썩으면서 바닥에 떨어진다.
애벌레가 고추 열매에 침입한 흔적은 바늘로 찔러 놓은 것처럼 까만 점 정도의 흔적밖에 없어서 확인하기 어렵다. 한 고추를 갉아먹은 벌레는 다른 고추로 옮기며 피해를 주는 데 보통 서너 개를 가해하며 많은 경우에는 10개 이상 피해를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주 살펴서 애벌레가 피해를 준 흔적이나 배설물이 보이면 따서 멀리 버리고 약제를 살포해야 한다.
애벌레는 주로 고추 열매 속에 있기 때문에 약을 잘 맞지 않아 방제효과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알에서 깨어나 과실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제를 주는 것이 효과적이며, 주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이므로 초저녁이나 이른 아침에 약제를 뿌리는 것이 좋다.
담배나방의 등록된 약제
데시스, 장원, 런너, 팔콘, 리무진, 파밤탄, 후려니, 라피탄, 엑설트, 델리게이트, 진검, 에이팜, 바로확, 프레바톤, 알타코아, 섹큐어, 렘페이지, 애니충, 캡틴, 알지오, 스토네트
이들 약제 중에서 선택하여 살포하되, 같은 성분의 농약을 반복해서 사용하면 효과가 떨어지므로 다른 성분의 농약으로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사람이 먹으려고 고추농사를 지었는데 담배나방이 먼저 낚아채면 화나고 속상하다. 자동차 타이어에 송곳을 찔러서 펑크를 내듯 고추 열매에 구멍을 내고 못 쓰게 만드는 몹쓸 담배나방을 잘 감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