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청년 시절, 서울 도곡동에 있는 작은 교회의 청년부에서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해 여름 수련회 장소는 남해바다의 소록도라는 섬으로 정했다. 그 섬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다. 청년부를 지도하는 차 전도사님의 아버지가 소록도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을 닮아서 ‘소록도(小鹿島)’라고 불리는 그 섬은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하여 수용한 섬이다. 그러기에 거리끼는 맘도 들었지만 그 섬에 갈 기회가 쉽지 않고 남태평양의 어느 섬처럼 아름답다는 차 전도사님의 말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천안 삼거리를 지나 너른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푸른 물결이 남실거리는 남쪽 바다를 향해 달렸다. 소록도를 향하는 버스 안에서 문둥이 시인 ‘한하운’님이 힘겨운 발걸음으로 소록도로 가며 지었던 시를 떠올렸다.
고흥반도의 산을 굽이굽이 돌아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녹동에 도착했다. 녹동은 어촌치곤 꽤 규모 있어 보였다. 터미널에서 사람과 짐을 확인하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청년들은 바다가 보이자 누구랄 것 없이 함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장난도 치고 바다를 배경 삼아 사진도 찍었다.
눈앞에 보이는 소록도는 소나무가 우거지고 백사장이 아름다운 섬이었다. 육지에서 600m 정도의 거리라서 헤엄쳐서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둥병자를 이곳으로 이주시켜 격리 수용할 때 수용소 생활이 힘들어 바다를 헤엄쳐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차 전도사님은 배에 오르기 전 우리들을 모아놓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섬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단지 몹쓸 병에 걸러 흉측하고 이상하게 보일 뿐이므로 경계하거나 이상하게 쳐다보지 말라고 하였다. 또한 그들을 사진 찍는 것은 실례를 범하는 것이라며 거듭 주의를 주었다. 나환자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궁금함과 우리를 해하거나 병을 옮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서 소록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어릴 적에 시골에서 문둥이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었다. 문둥이들이 어린아이들의 간을 빼먹는다는 이야기 등등. 그러나 실제로 문둥병자를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배에는 우리 말고도 국립소록도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같이 탔다. 소록도 선착장에서 우리는 군부대를 들어가듯이 인원 파악을 하고 출입할 수 있었다.
중형버스를 타고 교회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은 어느 시골의 풍경하고 별다른 것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마늘과 양파를 재배하고 닭이나 돼지를 키우고 있어서 가축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버스는 소록도 병원을 지나 교회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를 맞이하는 성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언뜻 보기엔 병증이 눈에 띄지 않으나 대개 손에 장갑을 끼고 있거나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돋보기처럼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거나 귀에는 보청기를 꽂고 있는 분들이 많았고 얼굴은 화상을 입은 것 마냥 붉은 반문이 있었다.
증상이 심한 환자들은 국립소록도병원에 입원해 있고,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상태가 심하지 않거나 전에 병에 걸렸다가 다 나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문둥병으로 인해 손가락이 없거나 귀가 없거나 코나 입이 기형으로 생겨 보기에 조금은 이상해 보이지만, 그분들은 시골의 인심 좋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같은 분들이었다.
우리가 식사를 준비할 때 한 아주머니가 가마솥에 불을 지펴 밥을 해주시고 국을 끓여 주셨다. 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없냐고 물으시기에 깜박하고 양파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했다. 잠시 후 동네 이장의 목소리가 마을의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서울에서 온 학생들이 양파가 없다고 하니 집에 양파가 있는 사람은 가지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몇 분의 노인 분들이 양파와 감자를 가지고 오셨다.
식사할 준비가 다 되자 같이 식사를 준비해 주시던 아주머니는 같이 식사하자는 우리의 청을 한사코 마다하시고 집으로 가셨다. 그분들은 스스로 우리와의 거리를 철저히 두었다. 어느 땐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이 몸에 밴 습관이겠지만 일반인들이 먼저 경계를 하니 그렇게 된 것 같아 씁쓸했다.
그분들을 처음 볼 때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시 볼 때는 한 발짝 다가갔고, 또다시 볼 때는 스스럼이 없어졌다.
우리가 그들에게 품은 거리낌과 두려움은 왜 들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어서다!
아이들이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은 귀신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라도 자주 보다 보면 친근하게 여겨진다. 옆 동네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정하고, 이웃나라 사람들도 만나보면 다감하다. 자주 만나면 아는 사이가 되고, 아는 사이가 되면 경계를 풀게 된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으면 안타까워 하지만 들의 너구리가 죽으면 데면데면 한다. 같은 갯과 동물인데 왜 이런 차별의 마음이 들까? 바로 자신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들의 너구리도 집에서 길렀다면 개처럼 곰살갑게 대할 것이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오해를 더는 것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얼굴이 잘 생긴 사람과 못 생긴 사람, 머리가 똑똑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 말이 달변인 사람과 어눌한 사람, 사지가 멀쩡한 사람과 지체 장애인, 얼굴이 하얀 사람과 까만 사람, 행동이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 돈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나이가 든 사람과 어린 사람, 그리고 여자와 남자. 다 사람이다. 단지 나와 다를 뿐이다.
나보다 새끼손가락이 짧은 것이 뭔 대수인가? 다만 새끼손가락이 나보다 짧을 뿐이다. 그뿐이다. 자주 만나며 서로 아는 사이가 되면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더 이상 막연한 두려움과 오해는 없을 것이다.
교회에 도착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분들은 매일 낮 12시에 모여 통일을 위한 기도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우리들을 환영하는 뜻으로 특송을 하셨다. 열 분의 할아버지가 일어섰는데 대여섯 분은 앞을 보고 섰고 서너 분은 좌 또는 우로 비켜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들은 눈이 보이지 않아 앞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분들이었다. 모두가 위를 향해 고개를 살짝 들었고, 그중 한 분이 찬송을 시작하자 그것을 신호로 다른 분들도 같이 찬양을 하였다.
처음 시작하신 분이 첫음을 너무 높게 잡아 우리는 따라 할 수 없었으나 그분들은 자기의 음 높이로 각자 찬양했다. 화음이나 음정이 전혀 맞지 않아 피아노를 치려고 의자에 앉았던 명숙이는 애써 잡음(?)만 내다가 슬그머니 내려왔다.
완전한 불협화음이다. 그렇게 엉터리 노래는 처음이고, 그렇게 은혜로운 찬양도 처음이다.
가사를 다 외워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손을 벌리며 목청껏 찬양을 하시는 할아버님들의 모습에서 나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감동적으로 찬양드리는 모습은 이제껏 보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못 볼 것이다.
그분들의 찬양하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예배 중 찬양할 때 우리는 어른처럼 오히려 점잖은데 그분들은 아이처럼 몸을 들썩이며 손뼉 치며 찬양했다. 손가락이 다 뭉그러진 한 노인은 손바닥 대신 손목으로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그것은 천사들의 찬양이다. 하늘의 천사들이 흉측한 문둥병자의 몸을 빌어 지상에 내려와 우리 앞에서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광고 시간에 환영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드리며, 나를 비롯하여 모든 청년들이 앞에 나란히 서서 그분들께 큰절을 올렸다. 손자가 제 할아버지에게 세배하듯이.
오후에는 마을 앞 모래사장에서 뛰놀기도 하고 바위 사이의 웅덩이에 괸 물에서 게를 잡기도 하고 작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다. 모래사장 끝에는 커다란 바위가 반도처럼 삐죽 튀어나와 있는데, 그 위의 바닥이 바다 쪽으로 살짝 기울길 했으나 대체로 평평했다. 저녁에 그 바위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별구경 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해질 무렵 우리는 기타를 들고 장작더미를 가지고 모래사장을 지나 그 바위 위로 올라갔다. 높이가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바위이다.
우리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을 보며 모닥불을 피웠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부르니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차 전도사님은 밤 9시경에 먼저 숙소로 들어가셨고 우리는 모닥불에 통닭을 구우며 이야기를 하였다. 사방은 칠흑처럼 어두워지고 파도소리가 바닷가에 있음을 실감 나게 하였다.
진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바다를 보니 바닷물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위 아래 50㎝정도까지 차 올라왔다. 낮엔 먼발치에 있던 바닷물이 이젠 발치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어두워서 밀물이 몰려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 우리가 걸어서 들어왔던 모래사장은 이미 물에 잠겨 퇴로가 차단되었다.
바위 뒷산은 낭떠러지처럼 경사가 심하여 도저히 오를 수 없었다. 물은 점점 차오르는데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낭만적이던 파도는 괴물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그 괴물이 어슬렁어슬렁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마침 고깃배가 지나가기에 우리는 목청껏 배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배에 있던 사람이 분명 우리를 본 듯한데 그냥 지나갔다. 우리는 갑자기 말을 잃었다. 말을 하면 두려움이 번질까 봐 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난 회장으로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끄트머리에 펑퍼짐하게 솟은 열 평 남짓한 갯바위다. 우리가 들어온 모래사장은 이미 물에 잠겨서 되돌아갈 수 없었고, 반대편은 작은 갯바위들이 있던 곳인데 이곳도 마찬가지로 물에 잠겨서 그 깊이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육지와 이어진 곳은 뒤편의 바위 벼랑뿐이다.
벼랑은 육지와 이어진 유일한 통로인데 5m 높이의 절벽이다. 우리 중에 암벽등반을 하는 이가 있다면 오를 수도 있을만한 절벽이지만 우리 중엔 그럴만한 인물은 없었다. 진호더러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해보라고 했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독 안에 든 쥐 꼴이다.
바닷물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위의 바다 쪽의 바닥까지 차올랐다. 우리는 족제비에 몰린 병아리처럼 벼랑 쪽으로 모여 앉았다. 조금씩 차오르며 철석 거리는 파도는 뱀의 혀처럼 섬뜩하고 물귀신처럼 우르릉거렸다.
이런 상태로 밀물이 찬다면 한 시간 정도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찰 판이다. 겉으론 태연한 척 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죽음’을 실감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둘러앉아 기도회를 하였다. 한 시간 넘게 기도회를 하고 마쳤다. 금방이라도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바위를 삼켜버릴 것처럼 불어나던 바닷물은 다행히도 더 이상 불지 않았고 우리가 머문 바위의 바닥을 절반 정도 담근 채 까만 혀를 날름거리며 출렁이고 있었다.
한참을 지나니 바닷물이 조금씩 빠지는 것 같다. 그날이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사리 때인 것을 우리는 몰랐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알고 모르고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어른들이다. 바닷물이 달의 인력에 의해 하루에 두 번씩 들어왔다가 빠진다는 과학적인 상식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알고 있는 그 지식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두려움.
두려움은 초등학교 수준인 밀물과 썰물의 상식마저 떠올리지 못하게 우리의 머리를 얼리고 말았다. 강도를 만난 여자가 얼어서 소리도 못 내듯, 불을 보는 순간 두렵고 당황하여 옆에 소화기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듯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은 고드름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우리가 차오르는 밀물 앞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떨었던 것은, 우리 중에 바닷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없어서였다. 우리 중에 바닷가에서 밀물이 차오는 상황에서 고립된 경험이 없어서였다. 아무리 사나운 개도 묶인 개줄 너머의 사람을 해할 수 없으므로 개줄 길이 밖에 있으면 안심이다. 하지만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사납게 짖어대며 달려드는 개를 보면 저만치 달아나고 만다. 그 바닷가의 우리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였으며, 밀물 바다는 성난 셰퍼드였다.
새벽 두 시경에 모래사장이 다시 드러나자 우리는 바위를 빠져나왔다. 패잔병처럼 직수굿한 모습으로 숙소를 향했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우리는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고분고분해졌다. 자연 앞에서, 신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그리고 자신 앞에서조차 겸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낯선 섬에서 낯선 사람도 만났고 낯선 상황도 처했다. 낯선 사람은 거리감이 들고 낯선 상황은 무섭다. 반면에 낯익은 사람은 친근하고 낯익은 상황은 편안하다. 우리는 낯선 섬과 낯선 사람을 뒤로하고 소록도를 떠났다. 손자와 헤어지듯 못내 서운해하시는 소록도의 나병환자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만날 땐 낯설었던 섬과 사람이, 떠날 땐 낯익은 섬과 사람이 되었다.
육지로 향하는 배에서 뒤돌아본 소록도의 하늘에는 파랑새가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