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성탄절을 한 주 앞둔 지난 토요일에 교회에서는 사랑부의 잔치가 열렸다. 사랑부 선생들은 잔치를 준비하느라 종일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풍선으로 아치문도 만들었고 색종이로 갖은 무늬의 무대를 꾸몄다.
해거름 즈음에 아이들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선생들은 준비한 의상을 아이들에게 갈아입혔다. 어떤 아이는 천사처럼 하얀 옷을 입었고, 어떤 아이는 세계 나라의 전통의상을 차려입었다.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연극을 선보였다. 절뚝거리고 더듬거리고 어눌한 모양이지만 나름대로 진지하고 열심히 연기하는 모습들이 아름다웠다.
연극이란 삶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모습, 우리의 삶을 진솔하게 그렸다. 남들 눈에는 고깝고 서투른 꼬락서니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눈에는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기껍고 미더운 깜냥이었다. 단지 장애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따돌림과 눈 흘김, 그리고 값싼 동정을 받았던가?
하늘이는 일곱 살배기 사내 아이인데 얼마나 귀엽고 천진난만한지 모른다. 하늘의 천사처럼 아무 시름이 없어 보이는 아이, 그러나 이 아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어른은 이 아이의 맑은 표정을 보며 오히려 시름에 젖는다.
하늘이는 갓난아이 때는 오른쪽 목이 굳어지는 <사경(斜頸)>이라는 병 때문에 병원에 다녔다. 세 살이 되어서도 말을 하지 못했고, 또래와도 어울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화가 나면 벽에 머리를 박거나 제자리돌기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했다.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청각장애까지 겹쳐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했다. 병원에서는 이런 증상을 ‘수용성 언어장애’, ‘정신지체’, ‘자폐’라고 진단을 내렸다.
행사 중에 하늘이 아빠의 간증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겪은 일들은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하늘이 아빠는 연신 손수건을 눈에 가져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늘이 아빠의 목멘 소리와 느꺼운 눈물의 느낌을 알기에 같이 눈시울을 적셨다.
“…이런저런 방법들을 알아봤지만 아이의 상태는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하도 힘들어서 아픈 마음을 떨치려고 매일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그것이 이 일의 해결방법은 아니었죠. …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아이를…, … 하늘이를… 어떻게든 하늘이의 병을 고치고자 다시 매달렸습니다. 자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안쓰럽고…, 어느 날 옆에 누워있는 하늘이를 불렀습니다. … 하늘이가 듣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가 ‘네’ 하는 겁니다. 설마 하며 다시 한번 ‘하늘아’ 부르니 또다시 ‘네’ 하는 거예요. 다음날 병원에 가니 의사가 이상하다는 겁니다. 보통 청각은 점점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기는 어려운데 하늘이의 청각이 좋아졌다는 겁니다. 사람이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한 건데 우리에게는 이 당연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모릅니다. 비록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없지만 꾸준히 치료하고 기도하는 중에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봅니다. 무심코 하늘이의 손톱에 까만 것이 있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톱 틈에 때가 끼어있는 겁니다. 손톱에 낀 때를 보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하늘이는 손톱을 물어뜯어서 손톱이 자랄 틈이 없었고 손가락 끝은 항상 피가 덕지덕지 묻었었는데, 그 손톱이 자라서 때가 끼기까지 한 겁니다.”
내 손톱에는 보통으로 때가 낀다. 당연하다. 오히려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감격이었다. 보통이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함이듯, 그들의 특별함도 일반 사람들에게 보통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장애, 특별한 시선으로 보지만 말고 보통 눈길로 대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