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꿈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
아니, 꿈이라는 말조차 너무 거창하다.
뭘 좋아하는지, 뭘 할 때 가장 행복한지.
그것도 모른 채 40년을 살아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힘겨워하던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되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엄마에게 미술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엄마의 작품이자 자랑이었던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명문대에 들어가야 했다.
전공은 중요하지 않았다.
명문대 진학률이 실적이 되었던 담임선생님과 엄마의 계획으로 나는 무슨 과에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입시를 치렀다.
어차피 뭘 하고 싶은지 딱히 고민해 본 적도 없었기에,
엄마의 꿈을 이뤄드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엄마의 행복을 보는 것이 나의 행복이라고 믿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스펙은 좋았지만,
회사는 그것이 단지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어떤 회사도 나를 원하는 곳은 없었고,
나는 목적도 없이 나이만 먹고 있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나와 정반대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온 사람이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오던 사람이었기에
나도 자신처럼 꿈을 찾고 그 길을 걷게 되기를 나보다 더 바라고 응원해 주었다.
그런 남편의 응원에 용기를 얻어 무언가를 시작해보려 할 때 육아가 시작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일상 속에서 아이들은 점점 자라 갔고,
내 꿈은 다시 잊혀져 갔다.
내가 다시 꿈을 꿀 수 있을까?
두 아이의 엄마에게 그런 고민은 사치였다.
유치원생이던 큰아이의 친구들은 벌써 유치원을 마치고 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무언가를 제대로 배운다기보다, 맞벌이인 엄마들의 시간을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외벌이의 빠듯한 우리 집 형편에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수는 없었고,
한창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를 집에서 심심하게 놀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림을 그렸다.
아이가 가지고 놀 색칠놀이 견본을 만들어 주었고,
인터넷을 뒤져 아이들에게 맞는 미술놀이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조물조물 무언가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들이 참 행복했었다.
그러면서 막연하게 꿈을 꿔 보았다.
아이들이 자라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때는 나에게도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신기하게도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인의 소개였지만, 아이와 함께 그렸던 그림들이 포트폴리오가 되었고
처음 한 일이 또 다음 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출판사에서 어린이 교재 삽화 일에 대한 계약서를 쓰고 왔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출판사에 갈 때 뭐라도 사가야 하나,
이렇게 중요한 서류에 도장이 아니라 서명을 해도 되는 걸까.
남편이 이런 때는 아무거나 쓰면 안된다며 억지로 쥐어준 만년필이 안 나오면 어떡하지?
가는 길에 도장을 하나 파가야 할까?
생각보다 큰 규모의 출판사와, 나를 위해 준비된 정갈한 계약서가
나의 긴장과 고민을 무색하게 해 주었다.
우리에게는 작가님의 그림이 잘 맞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한없이 감사하고 따뜻했다.
미팅을 마치고 지하철에 타서야 미처 확인하지 못한 가족들의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어느새 철이 든 아이들은 엄마의 꿈을 응원해 주었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지지해 주었던 남편은 이제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는 거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남편은 자신의 꿈이 전업주부라고 했다.
꿈도 야무지지.
이제 시작이고 그만큼 부담도 많이 된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실망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렵게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섰으니,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볼 것이다.
즐겁고 행복하게
꿈을 이루어 볼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다.
봄에 피는 꽃이 있고, 여름에 피는 꽃이 있듯이,
우리가 꽃피는 날도 다 다를 거라고
혹시 지쳐있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응원하고 싶다.
바로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