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그릴 대상을 발견하고 선 하나를 그었을 뿐인데 이미 완성된 그림이 매직아이처럼 동동 떠오르는 기분. 마치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에서 천사를 발견하고 그가 나올 때까지 돌을 깎았을 뿐이라고 말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은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기분 좋은 흥분상태가 되어 나도 모르게 주위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모델에만 집중한다.
더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다가 뒷사람과 부딪히기도 하고, 내리는 문을 가로막고 서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집중해서 아무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고 심지어는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기도 한다. 오늘도 그랬다.
칙센트미하이라는 심리학자가 이야기 한 ‘몰입(flow)’이라는 개념이 있다.
무언가에 엄청 집중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른 건 눈에 뵈지도 않는 상태인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선이 가득한 지하철 안에서도 그런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평소에 남들 의식을 잘하고 수줍음도 많이 타는 내가 말이다. 오늘이 그랬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내가 몰입의 상태에 있던지 몰지각한 상태에 있던지 알 리 없는 모델들은 자기 마음대로 포즈를 바꾸거나 빈자리에 재빨리 가서 앉거나 내리려고 벌떡 일어나거나 하는 일들을 서슴없이 행한다.
그런 경우가 오늘은 유독 많았다.
미완성인 크로키를 걸어두고 변명이 길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앞에 쓰던 글이 정리가 안 돼서 급히 화제를 돌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시 쓰면 되는데, 앞에 쓴 글들이 아까워서 이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늘은 그런 날인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밖에서 약속이 있었고 10시가 넘은 시간에 지하철에 탔다.
한산한 지하철 맨 끝 칸 벽에 기대어 모델들을 노려보며 몰입에 빠졌다가 모델들이 빈자리에 앉거나 일어서 내리거나 하는 통에 몰입이 깨지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저기요, 30초만 그대로 계셔주시면 안 될까요?'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보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잠드는 한 청년을.
그렇다.
지금은 쉬는 시간이다.
이 지하철은 항상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쉼 없이 이동하지만,
그 안에 탄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그 시간이 지친 하루에 쉼표를 찍는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나의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처음 만난 사람도 있었고, 새로운 일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빠르게 걷기도 했고 많은 계단을 오르기도 했다.
그렇구나. 나에게도 쉼이 필요하구나.
너무 발밑만 보고 걷기만 했구나.
다시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는 사람도 있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행복한 표정의 사람도 있었고 근심이 묻은 사람도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적어도 지금 이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아주 잠시 쉬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눈물겨웠다.
그래서 나도 잠시 쉬어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