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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by 보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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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앉으니, 겉옷으로 가린 상처의 비릿한 피냄새가 더 진하게 올라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숨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현기증이 난다.


다행히 찔리지는 않고 옆구리를 베인 정도였다. 칼날이 몇 센티미터만 왼쪽으로 들어왔으면 치명적일 뻔했다. 프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솜씨로 보나 사후 대응으로 보나 아마추어가 분명했다. 그쪽도 서두르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지긋지긋하다. 빨리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우리는 명령을 통해 움직인다.

그 명령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명령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명령이 결국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는 믿음과 신념으로 우리는 목숨을 다한다.

함께 명령을 수행하는 동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개개인에게 어떤 명령이 주어지는지 또한 모른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따를 뿐이다.


지난겨울, 러시아 현장에서 급히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명령은 쉽게 따를 수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명령은 누군가를 제거하라는 것이었는데, 쉽게 납득을 할 수 없었다.


명령은 일방적으로 내려올 뿐 질문을 회신할 수 없다.

작전의 대상에 대한 의구심이 있을 뿐, 프로세스는 여느 때와 같았다.

장비가 지급되었고, 디데이가 정해졌다.

대상이 있었고, 명령이 있었다.

다만 그전과는 다른 스스로의 질문, ‘왜?’가 있었다.


조준경 속 나의 목표물은 ‘목표’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동안의 목표들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는 소탈했고 강인했다.

따뜻했고 냉철했다.

오래전 이라크에서 만났던, 우리를 전장으로 보내고 미안해했던 국가의 지도자.

나는 우리를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 대했던 그를 보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내 삶을 바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의 조준경 속에는 또 다른 모습의 그가 서 있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여러 소문이 들려왔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폭탄을 지급받아서 모처로 향했다고 했고,

우리의 작전을 시작으로 군사계엄을 일으킬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끝에는 나에게 주어진 목표의 제거라는 전제가 있었다.


나는 결국 디데이를 넘겼다.

몇 번의 찬스가 있었지만,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우리는 존재한다.

그런데 나의 행동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일인지 도무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플랜 B가 시작되었고 군사계엄이 일어났다.

하지만 다행히 국민들의 힘으로 계엄은 끝이 났고,

국가는 조금씩,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플랜 B가 실패로 끝나고 한풀이라도 하듯 나에게 손님들이 찾아왔다.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으니 용도폐기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낯이 익은 얼굴도 있었고, 오늘처럼 전혀 생소한 손님도 있었다.

남녀노소 국적 불문하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나를 찾아낸다.

내 몸에 추적기를 심어서 지옥에 가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허풍이 아니었나 싶었다.

이렇게 그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꼭 지켜야 할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광화문 한가운데에 있었다.

나의 목표는 국민의 희망이 되어 승리를 다짐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다가올 위협을 감지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기존 방식의 은밀한 명령은 내려오지 않지만, 지난 겨울 이곳에서 국민들로부터 직접 받은 강하고 분명한 명령이 있었다.


국민들은 국가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내 몸을 미끼 삼아 그 명령을 이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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