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먹고사는 문제예요)
오래전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할 때, 지인의 소개로 어느 비영리재단의 음원 앨범 재킷 디자인을 의뢰받은 일이 있다. 의미 있는 일이었고, 다른 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좋은 포트폴리오가 되겠다고 생각해서 별 고민도 없이 수락을 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평소에 마음만 가득할 뿐, 누군가를 돕는다는 일에 인색할 수밖에 없던 당시 형편에서 내가 가진 실력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뿌듯하고 보람 있었다. 하지만 재능기부는 어디까지나 재능 ‘기부’ 일뿐, 나는 그 일을 진행하는 동안 스케줄에 쫓겨 다른 상업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고 그 일이 꼬리를 물어 다른 일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그럴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당시의 나를 원망해야 하겠지만, 그 일의 일정을 맞추어 주기 위해 다른 일을 뒤로 미루다가 결국 못하게 된 것을 생각하니, 단순히 당시 나의 어설픈 실력 탓으로만 보기에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해내지 못한, 요령 없음은 인정!).
우리가 디자이너로 살아가면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디자인이라는 것은 언제나 클라이언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내 마음대로 무언가를 제작해서 판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땐 ‘시장’이라는 더 크고 냉정한 클라이언트를 상대해야 한다). 재능기부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유, 디자이너님이 귀한 시간 쪼개서 해주시는 건데, 디자이너님 마음대로 해주세요.’ 라며 디자이너의 결정을 오롯이 따라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처음에는 다 좋게 좋게 시작하지만, 결국 일이 진행되어 가다 보면 자신들의 생각과 기호대로 결과물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심지어는 조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재능기부던 재능 나눔이던, 그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쪽에서는 자신들의 니즈가 분명히 있고, 그 니즈를 해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어필한다. 그리고 그때 디자이너는 책임 있는 자세로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재능기부로 공짜로 해주는 건데 어떻게 그 요구를 다 따르냐고? 그 클라이언트는 예술가에게 작품을 받기 위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필요를 디자인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재능기부’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고용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디자이너’가 되어주기로 한 이상, ‘고용된’ 디자이너로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일을 진행하면서 본전 생각이 많이 났다. 참으로 옹졸하지만 사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어떻게 마냥 쿨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일을 하느라 다른 일도 놓친 상태인데(후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일들 때문에 디자인업을 혼자 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일을 함께 나누고 하다못해 일정관리라도 대신 진행해 줄 파트너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쪽 담당자가 계속 바뀌면서 수정은 도대체 끝나지를 않고, 거기에 더해 다른 작업 요청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메인디자인을 활용한 포스터와 행사 초청장까지… 거절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어떻게든 마무리를 내 손으로 지어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완료되었을 때,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가 고스란히 휘발되어 날아가 있었고, 내 손에 쥐어진 건 내가 디자인한 앨범 몇 장과 행사 초대장 몇 장이 전부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할 때는 그래도 기왕 하는 거 즐겁게 하자고 하고 포트폴리오의 한 페이지에도 채워놨으면서 지금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부끄럽다. 누가 협박한 것도 아니고 결국 선택은 내가 한 일인데, 이 뒤끝은 무엇인가(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내가 망해 온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고 나 아닌 다른 누군가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도와주기 위함이다. 재능기부, 좋다. 의미 있고, 포트폴리오도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고 여유가 될 때 할 수 있는 선택이 되어야 한다. 물론 지금 아무런 스케줄이 없다면 경험삼아 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양손에 과자를 쥐고서는 새로운 과자를 또 집을 수는 없다. 직업으로서의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은 생계가 달린 일이다.
나는 위와 같은 경험을 해서 그런지, ‘재능기부’라는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위에 이야기한 한 건의 사례만 있었을까… 한숨과 사이다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한가득이다). 처음부터 재능기부라는 조건을 전제로 일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는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서로 협의가 되면 정당한 대가를 먼저 지불한 후에 다시 기부를 받는 구조가 서로에게도 깔끔하고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한다.(이렇게 되면 기부금 영수증도 발급받을 수 있어 디자이너에게도 유익하다). 돈을 줬다 뺐는 것 같아서 처음 마음과는 달리 기분이 좀 상할 수도 있는데(다 내가 해봐서 안다), 그것은 처음 협의단계에서 디자이너 스스로가 그래도 괜찮은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보고 납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이건 뺏기는 게 아니라, 내가 기부하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전제로, 디자이너의 노동에 정당한 가치를 매겨주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물론 지금처럼 디자이너 인력도 많고 여러 가지 툴의 개발로 누구나 손쉽게 일정 수준 이상의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에서 얼마나 적절한 수준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그 일을 하는 디자이너 스스로 결정해야 할 몫이고, 적어도 사회는 디자이너의 노동을 ‘재능기부로’, ‘지인이니까’, ‘간단하니까’ 등의 이유로 거저 얻으려 하지 말았으면 한다.
디자이너가 오랜 시간 고민하고 노력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은 인쇄물이나 물건 등 유형의 것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된다(디지털 콘텐츠는 나름의 방식으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비용이 발생하게 되는데, 인쇄소에서 인쇄를 한다면 기본적으로 종이값과 인쇄비, 가공비, 운송비 등의 비용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유형의 것들에는 당연하게도 재화를 지불하고 종이를 사거나, 가공을 하고, 운반을 한다. 디자이너의 노동도 그런 가치를 부여해 주면 안 될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디자이너의 수고와 시간이 무가치하게 매겨지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건 디자이너 스스로가 항상 생각하고 정당하게 요구해야 할 가치이다. 자신이 먼저 자신의 가치를 네고하지 말자. 자신의 가치를 가장 잘 포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