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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싸 Sep 19. 2023

꿈은 잘 때만 꾸는거죠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1990년대 말,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학원 갈 형편은 안 되는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수업이 끝난 미술실에 모여 쥴리앙(미대 입시생들이 그리는 석고상 중 머리가 신경질 나게 곱슬거리는 석고상)의 머리통을 노려보며 4B연필을 스케치북에 갈아내고는 했었다. 우리는 모두 미술을 하고는 싶어서 여기에 모였지만, 미대에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없었고, 순수미술로는 먹고살지 못할 것 같아서(라고 주위에서 만류해서), 차선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미술계열인 디자인과로의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때 함께 학교에 남아서 그림을 그리던 친구들은 대부분 디자인과로 진학을 했고, 나는 그래도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디자인이 아닌 만화예술과에 진학을 했다. 지금은 디자인이 무언가의 대안이 아니라 디자인 자체로 훌륭한 전문성을 가진 직업이 되었지만, 적어도 그때 우리에게만큼은 디자인은 그런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현실과 타협해서 디자인을 생각했던 우리와는 달리 원래부터 자신이 가진 꿈이 디자이너였고 지금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살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며 꿈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미래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등 떠밀려 그냥 되는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정신없이 달려온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에 대한 고민을 별로 해본 적도 없었고 할 필요도 없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여러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그 갈림길을 지나 각자가 선택한 삶의 언덕을 넘어 중년을 지나고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는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의 길을 따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 나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적당한 짐을 지고 적당히 타협하며 적당히 평탄한 길을 걸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남들이 마다하는 험한 길을 어쩔 수 없이 힘겹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각자의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익숙함과 안정이라는 호수를 만나게 된다. 지나온 삶의 걸음에 따라, 각자가 처한 주변 환경에 따라 그 시기는 각기 다르겠지만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크던 작던 그 호수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고민한다. 이곳에 머무를 것인가 계속 걸어볼 것인가, 이 호수를 넘어 다시 길을 떠난다면, 가던 길로 계속 갈 것인가 다른 길을 찾아볼 것인가. 그런 고민들을 외면하고 호수에 머무르면, 그동안은 행복하고 평안하지만 이곳을 지나 앞서 나아가는 이들의 등을 보며 자신만 이곳에 남겨진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걷던 그 길로 다시 걷다 보면 이 길이 최선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불안하기도 하다. 용기를 내서 그동안 걸어오던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따라 걷는 이들도 있다.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물론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클 때가 많다. 이러나저러나 삶의 여정은 어렵고 두렵고 불안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걸어온 익숙한 길을 걷는다. 처음의 시작이 어찌 되었든, 이미 걷는 길을 쉽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 특히 책임의 무게를 많이 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길을 바꾼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크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랬다. 젊어서 배운 기술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가족들을 잘 돌보는 것. 그것이 책임을 짊어진 자들의 숙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우리들도 특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다른 모양과 무게의 책임을 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다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유튜브나 자기 계발 책들을 보면, 용기를 내서 지금의 상황을 뛰어넘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앞에 전제를 달아주지 않는다. “내가 책임질 테니”. 그도 그럴 것이, 감히 누가 누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런 영상을 보고 책을 읽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가 껐다가를 반복한다. ‘그들은 특별하니까’, ‘그들이 공개하지 않은 무언가 도움이 있었을 거야.’ 등의 생각으로 성공한 그들의 삶과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을 구분하면서.


 지금의 삶을 살아내는 우리에게는 모험보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나 역시도 현실에 쫓겨 불안해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고민만 해왔다. 디자이너로 오랜 시간 살아오고 많은 고민을 해왔지만 내가 정말 디자인을 좋아하는 건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글의 서두에 밝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미대 갈 형편은 안되고 먹고살기 위해 차선책으로 디자인을 선택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나다(만화과를 한번 갔다가 다시 돌아가긴 했지만). 선택한 길이 디자인이었으니, 기왕 걷게 된 길을 더 잘 걸어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중간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어 보기도 하고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이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 과정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나의 꿈은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디자인은 나를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도와준 수단이었고, 기쁨과 보람을 준 좋은 친구지만, 오랫동안 고민하며 찾은 나의 꿈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한다. 지금 이렇게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을 보면 ‘글 쓰는 거 좋아하는 사람 글이 뭐 이래?’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죄송합니다…), 나는 ‘글자’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내 머릿속에만 머무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펼쳐 놓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것이 참 즐겁고 행복하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그동안 내 삶에서 쌓였던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소재들을 마음껏 버무리면서, ‘이 이야기에 이렇게 쓰이려고 내가 그 길을 걸으면서 이 보물을 찾았구나.’ 하는 순간을 마주하고는 전율을 느낄 때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고 나의 꿈이라는 것을 발견한 지는 채 얼마 되지 않았다. 막연히 글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게 좋아서 여기저기에 끄적이고 기록들을 쌓아왔는데, 그 기록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그때만큼은 그 세계 안에 갇혀서 밖으로 나오기 싫은 기분을 경험하고는 한다. 오랜 시간 나를 관찰해 온 ‘내남편전문가’인 내 아내도 내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자타(처) 공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그렇게 글을 쓰는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냥 내가 좋아한다고 거기에서 그치면 취미일 뿐이고, 그 일이 취미를 넘어 앞으로 나의 삶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지금 먹고살고 있는 디자인에 쏟아부은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글도 써보고 책도 많이 보고 있다. 물론 그 일들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니, 내가 좋아는 하지만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왕도가 없다. 그저 즐겁게 많이 해보는 수밖에.


 앞으로의 삶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갈지 나는 알지 못한다. 책임의 무게가 있기에, 다 던져버리고 내가 발견한 꿈을 향에 앞만 보고 달릴 만큼 (이제는) 무모하지 않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매일매일 더디지만 조금씩 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나누어 줄 수도 없는, 혼자 가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 만족하고 그칠 수도 있고, 언젠가는 혹시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그런 과정들을 지나가며 나는 점점 꿈을 이루어 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 아니, 외면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당연히 현실을 살아내야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고,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 더해 우리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뒤로 미뤄두었던 우리의 꿈을 찾아내고 손을 잡아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시간을 쪼개고 열심을 내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보자. 우리의 꿈은, 그냥 조용히 잊히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하다.

꿈을 이루어가는 소상공인들을 응원하기 위해 진행했던 서촌 동네그림 프로젝트 - 머핀집 고로롱,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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