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부끄럽고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 <망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노하우>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다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남들과 비교하세요 - 성공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세요.
- 현재 위치에 안주하세요 - 지금 현실에 만족하며 현실을 즐기세요.
- 보람으로 충분해요 - 돈을 좇기보다 보람과 가치를 위해 일하세요.
- 일단 만들어서 팔아보세요 - 디자이너라면 무언가 만들어서 팔아보고 싶은 것이 있죠.
- 스펙이 뭐 중요한가요 - 디자이너는 포트폴리오와 이력으로 말하는 사람이죠.
- 좋은 게 좋은 거죠 - 아는 사이에 굳이 딱딱하게 서류, 절차 등을 챙길 필요 있나요?
- 혼자 할 수 있어요 - 디자이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할 수 있는 완벽한 직업이죠.
- 고독을 즐기세요 - 혼자 사색하고 충전하는 시간은 많을수록 좋죠. 디자이너는 예술가니까요.
- 꿈은 잘 때만 꾸는 거죠 - 지금 현실에 충실하는 게 어른스럽죠.
각 챕터 제목들과 간단한 설명을 달고 보니 무언가 그럴싸한 기분도 든다. 설득력이 있다. 나 역시 저런 생각들을 가지고 이제껏 살아왔으니, 오랜 시간 내 삶을 이끌어 온 디자이너로서의 나의 직업관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저 이야기들에 속으면 안 된다. 누구라도 저 중에 하나라도 혹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다시 정신을 다잡고, 이 글의 제목을 재확인해야 한다. <망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노하우>. 그렇다. 위에 서술한 저 이야기들은 나의 경험을 근거로 한, ‘망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노하우이다. 이제 저 제목 뒤에 숨은 부제목을 간추려보겠다.
- 자존감을 키우세요 - 타인과 비교해서 스스로를 판단하지 말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훈련을 하세요. 부족한 점은 스스로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요.
- 성장을 멈추지 마세요 - 현재 실력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다 보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어요.
- 디자인은 먹고사는 문제예요 - 먹고사는 일보다 더 훌륭한 가치는 많지만, 내 삶이 안정되어야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겨요.
-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 온라인 몰의 활성화로 진입장벽이 낮아졌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요. 어설프게 준비하면 안 돼요.
- 스펙을 포기하지 마세요 - 아직 한국 사회에서 스펙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학위든, 자격증이든,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요.
- 프로다움이 신뢰의 기본이에요 - 자신을 믿어주고 일을 맡기는 지인일수록, 정확한 절차와 꼼꼼한 서류에 더 신뢰를 가질 거예요.
- 사업은 혼자 하면 벅차요 - 혼자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안정된 수입을 내고 일을 이어가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요. 든든한 파트너와 함께 하는 것이 오래갈 수 있는 비결이에요.
- 자신만의 세상에 갇히지 마세요 - 디자이너는 트렌드에 항상 민감해야 하고, 끊임없이 소통을 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 꿈은 우리 삶에 활력을 주고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우리를 그 꿈과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어요.
이 부제목들은 처음에 나열한 각 챕터의 원제목에 상반되는 이야기로서,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과거로 돌아가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그때의 나를 만나게 되면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들이다. 물론 그때의 나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만 끄덕이고는 결국 마음대로 똑같이 살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는 또다시 이 고생길을 우당탕탕 지나오겠지… 으! 고집스러운 나는 꼭 직접 먹어봐야 매운 줄을 알고, 진짜로 자빠져봐야 아픈 줄을 아니까. 어디 나뿐이겠나. 남들이 이미 겪어봤으니 그렇게 하지 말고 제발 이렇게 하라는 조언과 당부들을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귀가 닳고 눈이 멀도록 보고 듣고 있지만, 막상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은 그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모든 일에는 준비가 필요하고, 이렇게 이미 그 길을 걸어가 본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준비가 된다.
이 이야기를 쓰기 전에 아주 오랫동안, 성공한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했었다. 디자이너라는 꿈을 갖고 세상에 나온 많은 이들에게, 성공한 디자이너로서 잘난 척도 하고 멋진 조언도 주면서 그들의 삶에 이정표가 되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심한 지 어언 10년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그 이야기는 도대체가 진도가 나가지 않고, 계속 제자리를 맴돌다가 그마저도 엎어지고 지워지기를 몇 차례… 이제는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지경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질까?
그냥 어떤 후배에게 내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써나가면 될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잘 안 풀리고 어려웠을까?
그리고 처음 글을 쓰기로 다짐한 지 몇 년이 더 지난 지금에야, 그 해답을 찾았다. 나는 성공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망한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성공한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뭘 알아야 쓰지. 디자이너로 성공을 해봤어야, 성공한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써볼 수 있을 것 아닌가? 이렇게 당연한 걸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다니.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차분히 생각을 해보았다.
왜 그토록 글이 쓰고 싶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이전 챕터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왜 디자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내 삶의 오랜 시간을 디자인과 함께 살아왔고,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 이야기'에는 결국 나의 삶이 가장 잘 녹아 있으니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모든 창작자들의 본능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디자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나의 잘난 자존심 때문에 혼자 맨땅에 헤딩을 너무 많이 했다. 충고를 해준 사람들도 많았고 도와준 사람도 많았지만, 항상 한 귀로 흘려들으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성공보다 실패가 익숙한 사람이 되어 이 자리에 이르렀다. 내가 그렇게 실패한 디자이너이기에 성공한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를 못쓴다고 하면, 반대로 실패한 디자이너가 되는 법에 대한 이야기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 이야기 따위 누구에게 어떤 도움이 된다고 그런 이야기를 쓸까 하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들었지만, 내가 그동안 디자이너로 실패하고 망해가면서 방구석에 앉아 곱씹던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하면 망한다고 누구 한 사람만 이야기해 줬어도…”
하긴 당시의 건방졌던 나는 그런 충고 따위 무시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쫓기듯 세상에 나오기보다, 실패할 가능성에 대해 한번쯤 더 생각하고 조금이나마 조심하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나는 이 글을 썼다. 지금 혹시라도 여러 갈림길 중 내가 걸어왔던 길과 비슷한 길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최소한 나처럼 망하지는 않도록. 그동안의 나의 실패와 망함은 오늘 당신을 만나, 당신이 나처럼은 망하지 않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디자인은 참 좋은 직업이다. 가지고 있는 기술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꿈을 눈앞에 보여줄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고 축복받은 일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이야기들에서 단서를 찾아 단어를 만들고 상징을 찾고 눈앞에 보이는 무언가로 만들어준다. 그런 결과물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을 때 그들의 행복한 표정을 만난다는 것은 디자이너만이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이다. 나는 지금도 클라이언트로 만났던 모든 이들이 생각난다. 들뜬 얼굴로 가게를 열게 되었다며 로고를 부탁하던 작은 동네 카페 사장님도 있었고, 함께 밤을 새우며 책을 만들던 작은 출판사 대표님도 있었다. 훌륭한 기업가였던 부친을 기리는 전시관의 오픈 전날 밤, 부친의 사진 앞에서 짓던 클라이언트의 복잡한 얼굴은 전시 부스 안쪽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무리 작업을 하던 나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누차 내가 실패한 디자이너라고 떠들었지만, 그 얼굴들을 기억하는 한 계속 디자인을 할 것이다. 나의 꿈도 좋고 내가 행복한 일도 좋지만,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었던 경험을 쉽게 놓고 싶지는 않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난날 겪었던 실패들을 또다시 겪을 것이고, 스트레스도 많을 것이다. 다시 또 언젠가는, 이제는 진짜로 디자인 따위 쳐다도 안 보겠다며 생떼를 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또 시간이 지나면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보람을 생각하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고 서체를 고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전의 ‘망했던’ 기억을 자양분 삼아 ‘망하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부터 10년 후, 그때 나는 전업으로 글 쓰는 사람이 되어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에 대해 여전히 신나게 떠들 수 있으면 좋겠다. ‘성공한 디자이너가 되는 노하우’는 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망하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는 노하우’ 정도는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진짜로 완전 쫄딱 망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노하우’를 거침없이 쭉쭉 써 내려가는 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도, 당신도, 행복한 디자이너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