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마케터 안병민의 통찰스케치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신체적으로는 성인에 가깝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아이에 머물러 있는 존재, 바로 청소년이다. 사회적 역할과 규범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정신적 성숙이 몸의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상태이기에 사춘기는 곧 거센 바람이고, 성난 파도다.
▶ 들어가며-중 2병을 앓고 있는 대한민국을 위하여
<어쩌다 한국인>의 저자 허태균 교수는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사춘기에 비유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국민행복지수, 사회적 갈등지수, 자살률 등 여러 가지 정신적, 심리적 지표들에서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한국이 청소년의 사춘기와 닮았다는 까닭이다.
허태균 교수는 심리학자답게 한국의 현재를 심리학적 관점을 통해 분석한다. 충분한 시간에 걸쳐 발전해온 서구 국가들에 비해 한국은 그 성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기에 작금의 혼란은 더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춘기를 잘 보내야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도 이 혼란의 시기를 잘 넘겨내야 한다는게 허교수의 말이다.
그러려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필수다. 문제가 없으면 정답도 없다. 이 책 <어쩌다 한국인>은, 그래서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이 자화상은 몹시도 불편하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속으로는 그랬던, 마음 속을 들켜버린 듯한 민망함 때문이다. 정말, 청소년 때도 딱 이랬다. 거울을 볼 때마다 스스로의 모습에 불만이 가득해 나를 낳아 준 부모를 원망했던 그 때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진단 자체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현상 자체는 가치중립적이고 또 그래야 한다. 보다 나은 내일을 빚어내기 위한 객관적 출발점이라서다.
허태균 교수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6가지 키워드로 설명한다. 주체성, 가족확장성, 관계주의, 심정중심주의, 복합유연성, 불확실성 회피가 그것이다.
한국사람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남에게 영향을 받기 보다는 주고 싶어한다. 이게 절대 무시당하고는 못사는 한국인의 주체성이다. 가족확장성은 자신이 속한 모든 사회를 가족의 확장판으로 이해하게 한다. 또한 한국인의 행동은 공식적인 역할보다는 관계주의적 관점을 따른다. 조직 내에서의 공식적 역할보다는 옆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한국인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는 숨겨진 마음을 더 중요시한다. 소통이 힘들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복합유연성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선택을 회피하게 만든다. 굳이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선택을 한국인은 싫어한다.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는데 왜 하나를 포기해야 하냐는 거다. 마지막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손에 잡히지 않는 걸 싫어하는 한국인에게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그래서 물질적인 만족과 수치로 표현되는 평가들에 의존하면서 한국인은 정신적인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그럼 허태균 교수가 안내하는 6가지 한국인의 특성을 하나씩 차례로 톺아보자. 먼저 주체성이다.
1 주체성-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한국 사람들은 여행을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왜 꼭 자신을 사진 한 가운데 넣어서 찍을까요? 외국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사진에 담을 뿐 그 안에 자기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허태균 교수는 날카롭게 짚어낸다. 구경은 가더라도 그 풍경보다 내가 더 중요한 게 바로 한국사람들이다. 나는 주인공이어야 한다. 그러니 남한테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보다는 영향을 주는 존재이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다. 2002년 한국 월드컵 응원은 그런 면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수십만 명이 거리에 몰려나와 벌였던 응원으로 한국은 4강에 올랐다. 응원과 4강이란 결과의 인과관계는 중요치 않다. 다같이 모여서 뭔가를 이뤄낸 듯한 그 느낌이 중요한 거다.
이런 주체성은 다양한 곳에서 드러난다. 이른바 갑질도 그렇다.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은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한다. 갑질의 시작은 대부분 ‘너 나 무시하지?’다. 이어 나오는 말, ‘내가 누군지 알아?’다.
“한국사회는 종종 사회경제적 수준에 비해 준법의식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 역시 주체성 때문이라는 게 허태균 교수의 진단이다. 아무도 없는 심야의 사거리에서 혼자 신호를 지키느라 서 있는 건 한국인들에겐 바보 같은 일이다. 규칙이나 규정에 상관없이 한국인들은 상황에 맞는 주체적 판단을 내린다. 법을 어긴다기 보다 더 나은 판단을 주체적으로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 개개인들을 보면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님에도 한국 사회에 비리, 범죄,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만 따르기에는 한국인들은 너무나 주체적인 사람들이다.
이는 리더십 차원에서도 눈 여겨 볼 대목이다.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리더는 주체성에 목말라하는 직원의 존재이유를 짓밟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가족확장성-모두가 가족인 사회
한국에서 가족의 개념은 유교의 효 사상에 근거한 동양적 특성을 넘어선다. 가족 개념의 사회적 확장이 일어난다는 게 특징이다. 식당 아줌마도 이모고 회사 선배도 형님이며 아빠 친구는 삼촌, 엄마 친구는 이모다. ‘군사부일체’란 말을 한국사람들은 임금과 스승을 어버이처럼 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는 군대에서의 사고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자식이 군대에 갔다 사고를 당했다는 건 사회에서 당한 사고와는 다른 의미다. 가족확장적 성향을 지닌 한국인들에게 군대는 내 아이를 잠시 맡겨둔 큰집 같은 곳이기에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허태균 교수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의 반응도 그런 관점으로 설명한다. 세월호 사건은 일반적인 여타 사건들과는 달랐다는 거다. 배가 채 넘어가기도 전부터 전국에 생중계되기 시작했고, 넘어가는 과정에서 침몰하는 순간까지, 심지어 침몰한 이후에도 뒤집힌 배의 앞부분이 수면 위로 올라와있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모든 사고는 피해 당사자에게는 큰 좌절이지만 직접적 관련이 없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남는다. 하지만 세월호의 경우는 생중계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국민의 간절한 바람이 되었다. 결국 아무도 구해내지 못하고 끝나버린 마지막 그 순간까지, 이토록 온 국민이 다같이 엄청난 좌절을 겪었던 경우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다. 앞서 이야기한 가족확장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대통령의 사과는 당연한 일이다.
물론 한 명 개인으로서의 대통령의 과실은 그리 크지 않은 게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한국인과 한국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의 주장이다. 전술했듯이 한국인의 마음 속에 대통령은 곧 어버이다. 이는 국민이 대통령을 대할 때만 그래야 한다는 게 아니라 대통령도 국민을 대할 때 그래야 한다는 의미다.
“대중의 힘을 얻어 리더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뽑힐 때는 대중의 마음에 기대고, 뽑히고 나서는 이러한 마음이 잘못됐다는 논리는 간사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한국인의 마음이 옳은지 그른지가 아니라 그 마음에 어떻게 적절히 대응하느냐일 것입니다.”
3 관계주의-우리가 남이가?
“일본에서는 정말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합니다. 공식적인 조직 속에서 자신에게 정해진 역할과 의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한국 문화는 다릅니다. 한국인에게는 조직보다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조직과 회사와 같은 거대 시스템보다는 바로 내 앞과 옆에 앉아있는 동료와 상사, 부하직원과의 일대일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한 겁니다. 한국 사회가 수직적이라고 하지만 조직적 수직체계만 중요시해왔다면 훨씬 살기 편했을 겁니다. 그런데 한국은 ‘관계적’ 수직사회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이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한국사람들이 조직에 충성하고 주어진 공식적인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옆의 상사와 동료에게 충성하고 타인과의 일대일 관계에 더 충실한 이유다. 이는 양날의 검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그 사람과 조직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때 문제가 생긴다.
한국인의 관계주의는 언어에서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학창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자. 영어시간에 배운 부정의문문 말이다. 예컨대, ‘Didn’t you have a dinner?’라는 문장은 ‘저녁 먹었니?’가 아니라 ‘저녁 안 먹었니?’라는 질문이다. 대답은, 먹었으면 ‘예스’고 안 먹었으면 ‘노’다. 하지만 우리 말은 다르다. ‘안 먹었니?’라고 물어보니 먹었으면 ‘아니, 먹었어’이고 안 먹었으면 ‘응, 안 먹었어’가 맞는 대답이다. 영어의 부정의문문에서 늘 헛갈렸던 대목이 바로 여기다.
포인트는 이거다. 영어는 상대가 뭐라 물어보든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 말은 상대의 질문이 주가 된다. 내 대답은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언어로서 영어의 궁극적 목적이 ‘정확한 서술’이라면 한국어는 ‘상호적 반응’이다. 그러니 한국인들은 실제의 내용보다는 ‘내 말을 잘 듣고 있다’는 주관적인 느낌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니 소통이 힘들 수 밖에.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남성적 문제해결보다 여성적 공감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요한 건 소통의 정확도나 효율이 아니라 공감과 배려다. 아프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병원에 가 봐”라는 대답은 그래서 빵점이다. 예전엔 사회가 단순했다. 그러니 ‘아’만 해도 ‘어’까지 알아주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다단해졌다. 상호반응적 소통에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이유다.
이런 관계주의 속성에 있어서도 역시 문제가 많다. 사고에 대한 대처 부분이다. 사고는 사람에 의해서도 일어나지만 기계적 오류나 시스템이 원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사고를 일으킨 ‘사람’을 찾는 데 집중한다. 이른바 ‘예고된 인재’라는 표현이 바로 그 예다. 한국사회는 구조가 아니라 사람에 방점을 찍는 관계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 사건마다 잡아 넣어야 할 나쁜 ‘사람’은 계속 나오는데도 그런 사고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시스템이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관계주의적 심리 특성 때문에 한국인의 분노는 누군가 그 대상이 나타나면 너무 쉽게 해소된다. 사고를 일으킨 나쁜 놈이 처벌받는 걸 보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4 심정중심주의-노력에 중독되다
“심리학에서는 서구 사회를 ‘저맥락사회’라고 합니다. 저맥락사회에서는 의사소통의 본질이 정확성에 있고, 메시지 자체의 내용이 명확하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밥 더 드릴까요?” 했을 때 “아니요, 괜찮습니다” 라고 하면 진짜 괜찮은 겁니다. 하지만 고맥락적 의사소통을 하는 한국에서는 다릅니다. 괜찮다 그래도 진짜 괜찮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권합니다. 우리는 이걸 '배려"라 부릅니다. 이런 특성은 행동보다는 ‘마음’을 중시하고 내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는 심정중심주의에서 비롯됩니다.”
심정을 중시하는 이런 특성의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대표적인 게 ‘인고의 착각’이다. 공부하는 자녀를 위해 스스로 금욕주의적 생활을 선택하는 많은 부모들이 그 예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만큼 후일에 보상을 받을 거라고 믿는다. 이토록 절실한 내 심정을 하늘이 알아주겠지 하는 맘이다. 인과혼동의 오류다. 세상에는 고생을 한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은데도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고생은 성공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중요한 건 고생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고생의 내용이다. 성공에 맞닿아있는 고생이라야 의미가 있다.
예컨대 공부하는 자녀의 성공을 빌며 TV도 안 보고 일체의 재미를 포기한 채 부모가 밤새워봐야 별 무소용이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해준다든지 자녀가 모르는 문제를 공부해서 가르쳐준다든지 하는, 성공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고생이 의미가 있다는 거다. 지금 고생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장밋빛 미래가 올 것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보할 이유가 없다. 놀고 있는 자녀를 두고 못 보는 부모들, 깨어나야 한다.
모든 자원을 자녀의 교육에 쏟아 부었는데 그 자녀가 공부로써 본전을 찾을 능력이 없었다면 그 집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안하니까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한다. 자녀 사교육에 모든 걸 쏟아 붓고 있는 많은 한국의 부모들은 사실 그것 외에는 뭘 해야 할지 모르기에, 아무것도 안 하자니 불안하기에 그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녀를 위해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나중에 자녀가 성공할 거라는 인고의 착각에 빠진 채로. 결과는 뻔하다. “내가 너를 그 고생을 해서 공부를 시켰건만”이라는 부모의 말에 “내가 공부 안 한다고 했지요. 왜 내 말 무시했어요?”라는 자녀의 원망이 이어진다.
대한민국 교육에 있어 문제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사교육비나 대학등록금이 비싼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투자한 교육비를 회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안 된다는 거다. 대학진학률이 70프로를 넘지만 대학졸업장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많아야 40프로가 안 된다. 다시 말해 대학을 졸업하는 청년들의 50프로는 투자한 시간과 돈의 본전을 찾을 길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대학등록금을 낮춰봐야 도움될 게 없다. 오히려 이 때문에 애꿎은 대학진학률만 더 높아질지도 모른다.
선진국 사람들은 대학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시간을 더 늘리지도 않는다.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비워둔 시간을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으로 채운다. 가족, 친구, 봉사,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저마다의 가치를 찾아 활동하니 다양성이 사회에 가득하다. 창의성은 이런 사회에 싹을 틔운다. 한국사회가 창의적이기 힘든 이유다.
성공과 경쟁을 버리라는 게 인생을 막 살고 꿈을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공부로 승부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안 되는 건 안되는 거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하버드대를 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노력만 하면 된다 이야기하는 건 무책임 아니면 사기다. 노력해서 하버드대를 가라 얘기할 게 아니라 하버드대를 가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대학진학률이 현재의 절반으로 떨어진다면 한국사회에서 교육비로 들어가는 35조원의 절반이 다른 데 쓰일 수 있다. 그 돈이 입시과목이 아닌, 재능을 위한 교육에 쓰인다면,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성공의 기회가 돌아갈지 모른다. 자녀교육에만 맹목적으로 쓰이던 돈이 복지나 가족의 여가 활동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행복은 성큼 다가온다. 이미 세계 최장의 근무시간과 학습시간에 찌든 한국인에게 더 노력하면 더 많은 걸 가질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건 누가 봐도 미친 소리라는 게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허태균 교수의 강력한 주장이다.
5 복합유연성-포기는 싫어, 모두 가질래
“서양에서 대립적 개념으로 보는 많은 것들을 동양에서는 상호유기적이고 보완적인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중용의 가치를 배우며 융화와 화합을 추구하도록 배워온 한국도 비슷합니다. 그러니 한국인에게 어느 하나를 택함으로써 또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선택이란 건 참 불편한 개념입니다.”
허태균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엔 사회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가치가 없다. 한복보다 웨딩드레스가 더 익숙한 게 지금의 한국이다. 하지만 그런 가치가 원래 없었던 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맞으면서 사라져 버린 거다. 예컨대 전쟁과 같은 비일상적 극한상황에서 정신적 가치는 의미가 없다. 생사가 코 앞에서 갈리는 비인간적 현장이라서다. 내 생명과 생존에 비해 인간의 존엄성, 상징적 가치, 사회적 규범이란 한없이 허무하고 가벼울 따름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가치 대신 우리에게 남은 건 가난에 대한 두려움, 물질적 풍요와 성공에 대한 갈망이란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 한국인 특유의 복합유연성이 더해지니 한국 사람들은 선택을 싫어한다. 다 가지면 되지, 왜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회사에서 일하느라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가족의 사랑은 변치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학원에서 보내느라 친구와 놀 시간을 주지 않아도 내 아이의 사회성과 인성을 괜찮을 거라 확신한다. 선택에 따른 포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거다.
“정치에 대한 시각도 그렇습니다. ‘나는 편향될 리가 없다’는 심리 상태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진보정권이 진보정책을 취할 수 없고, 보수정권도 보수정책을 취할 수 없습니다. 진보가 보수의, 보수도 진보의 정책을 모두 추진하길 바라는 겁니다.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겁니다. 심지어 ‘돈’과 ‘복지’처럼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무상 복지’, ‘증세 없는 복지’란 슬로건이 나올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을 싫어하는 한국사람들은 모순적이게도 매우 빠른 선택을 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잃을 게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뭐든지 빨리 바꾼다. 자동차가 그렇고 스마트폰이 그렇다. 하지만 정신적 가치의 부재에 따른 공허감이 문제다. 가진 자는 가진 걸 잃어버릴까 걱정이고 못 가진 자는 가지고 싶은 욕망에 허우적거린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우리의 가치를 빨리 정립해야 하는건 그래서다.
관련하여 허태균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재미의 부재'다. 처방은 '포기의 권장'이다. 우리보다 먼저 저성장 시대를 경험한 선진국들에도 세속적인 성공을 포기한 젊은이들은 많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할 기회'를 어렸을 때부터 아주 체계적으로 제공받아 왔다는 게 우리와 다른 점이다. 이들은 세속적인 성공을 대체할 만한 수많은 가치들을 사회로부터 제공받는다. 그게 종교, 문화, 예술, 봉사건 간에 어려서부터 세속적인 성공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스스로 느끼고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정확하게는, 그들은 ‘포기’한 게 아니라 ‘선택’한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다. 그게 자신에게 재미있고 의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성적만이 가치고 돈만이 가치다. 그 외 다른 가치를 모른다. 그러니 한국사람들의 포기는 곧 좌절이다. 가진 것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실패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들은 피해자다.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평가할 다른 가치를 얻지 못했기에 재미도 잃고 의미도 잃은, 참 불쌍한 피해자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축제에도 나타난다.한국에서 축제의 의미는 지역경제 활성화, 즉 돈이다. 한국의 축제에서 대부분의 주민은 '장사'를 한다. '참여'는 관광객의 몫이다. 하지만 해외의 많은 성공적인 축제들에서 참여자는 그 지역 주민들이다. 주민들은 관광객에 상관없이 대대로 내려온 자기들만의 방식대로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의 축제를 즐긴다. 그들 스스로가 주인공이다. 그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6 불확실성 회피-보되 보지 못하고 듣되 듣지 못하다
“엄청난 속도의 인터넷 환경이 제공되는 한국입니다. 이통사들은 ‘더 빠른 속도’를 외치며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왜 빨라져야 하는지도 모른 채 속도만을 좇고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최신’, ‘최고급’, ‘비싼’, ‘빠른’, ‘큰’, ‘기벼운’ 등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건이나 수치화할 수 있는 것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불확실성 회피 성향은 한국인의 성공 비결이자 비극의 씨앗이었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걸 추구하다 보니 정신적 성숙보다는 물질적 성공에 매달리고, 과정보다는 결과에만 신경 쓰고, 장기적인 기다림보다는 단기적인 실적에 목을 맨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에 명확히 보이는 기준으로는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치화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예컨대 잠재력이다. 잠재력을 중요시한다 하면서 잠재력을 증명해 보이란다. 증명이 가능하다면 그건 이미 잠재력이 아니다. 그런데도 신입사원을뽑으면서 잠재력을 평가하여 수치화하는 웃지 못할 일이 한국에서 벌어진다. 수많은 곳에서의 수많은 평가라는게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는 배경이다.
수치화할 수 없는 개념을 수치화하려는 평가 방식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건 평가 결과의 활용 측면이다. 기업에서 직원 평가는 연봉과 승진, 해고를 결정하는 요소이지, 그 평가를 근거로 직원들의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평가는 적어도 미래와 관련해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성적도 마찬가지다.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공부 말고 다른 삶의 방법을 찾아줘야 한다. 그러기 위한 목적의 평가라면 누가 싫어하겠나? 단지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기 위한 평가이기에 지금의 평가는 진짜 문제다.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성향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예전에는 모든 게 부족했다. 뭔가 새로 만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명확한 과제였다. 거기에 '왜'라는 질문이 필요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게 습관이 되었다. 이유를 묻는 질문의 구조적 봉쇄다. 수직적 한국문화에서 왜라는 질문은 반항이자 거부다. 까라면 까야 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이유를 묻지 않는다. 아니 물을 수가 없다.
그러니 한국인의 생각은 그 기술을 사용할 ‘사람’이 아니라 ‘기술’ 그 자체에 머물러 있다. 사람이 필요한 무언가를 고민하기 전에 기술부터 눈에 들어오는 거다. 고객이 필요하지도 않은 첨단 제품들이 그렇게 시장에 출시된다. 결과는 뻔하다. 애플의 성공은 기술에 있지 않았다. 그걸 사용할 고객, 즉 사람에 있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만들면 아무리 안 팔고 싶어도 매출은 절로 올라간다. 관건은 인간에 대한 이해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못하는 우리에게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인문학의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다.
▶ 맺으며-좋고 나쁨을 떠나 새로운 출발
“과거의 시간들은 현재를 위해 존재한 게 아닙니다. 과거는 과거 그 자체로 중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재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매 순간이 우리의 중요한 삶이고 그 모습이 우리의 문화입니다.”
<어쩌다 한국인>,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한국인의 특성은 좋건 싫건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이런 속성들이 있었기에 그 험한 과거를 우리는 살아내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다. 좋고 나쁨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봐야 오늘의 한국과 한국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예측과 변화도 가능하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다만 사춘기를 잘 보내야 더 멋진 중년과 노년을 빚을 수 있는 것처럼 현재의 우리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노력에 주어진 밝은 등대다. 대한민국의 중2병을 지혜롭게 치료하고픈,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혁신가이드안병민
*안병민 대표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헬싱키경제대학교(HSE) MBA를 마쳤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의 마케팅본부를 거쳐 경영직무·리더십 교육회사 휴넷의 마케팅 이사(CMO)로서 ‘고객행복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이자 [이노망고]의 혁신 크리에이터로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 리스타트>, <경영 일탈>, <그래서 캐주얼>, <숨은 혁신 찾기>, <사장을 위한 노자>,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유튜브 채널 <방구석 5분혁신>도 운영한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