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160702 평화를 빕니다

회사를 그만 둔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회사를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겠다는 '독립' 말입니다. 그것도 14년에 이르는 회사 생활이었다면 던져 내고 싶은 고달픔만큼이나 뿌리칠 수 없는 달콤함 역시 많았을 터입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밤마다 쓰디 쓴 소줏잔을 기울이며 사표 운운하면서도 다음 날 자석처럼 다시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어제 회사를 그만 둔 한 분을 만났습니다. 6월 30일까지 출근하고 저를 만난 게 7월 1일이니 독립 1일차입니다. 만남의 계기는 어느날 제가 받은 문자 하나였습니다.


"대표님 인생의 방향성이 제가 가고자 하는 길과 비슷해서 꼭 뵙고 싶습니다."


이제 불혹, 아이 셋의 아빠이자 모 광고기업의 부장이었습니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몇 년 전 뇌종양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고서는 삶에 대한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일만 해야 하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답니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제 얘기를 듣고 비슷한 길을 조금 앞서 걷고 있는 저를 꼭 한번 만나고 싶어 연락을 했답니다.


예전 제 상황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내려진 대장암 3기 선고. 수술을 받고 12차례의 항암치료를 받으며 회사를 다녔습니다. 다행히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남들만큼 크지 않아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간에서 또 다른 이상이 보인다는 소견. 추가 6차례의 항암치료가 더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곤 2년간의 휴직을 택했습니다. 복귀가 보장된 휴직이었음에도 무척이나 두렵고 막막했던 결정이었습니다. 몇 번의 이직 경험이 있었지만 늘 다음 출근할 회사가 정해져 있던 상황에서의 이직이었기에 아침에 눈을 떠 어딘가 출근할 곳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한동안 참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휴직 후 한 달이 지나며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참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구나 하는 생각. 세상은, 아니 삶의 모습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넓고 다양하고 크구나 하는 생각. 휴직 2년이 다 끝나가던 시점, 제 결정이 '복귀'가 아니라 '독립'이었던 이유입니다.


울타리 안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울타리 밖으로 한 발을 내디디니 어렴풋하나마 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월급을 받는 회사원 말고도 너무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세상 곳곳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지금껏 받아온 모든 교육은 사실 좋은 '직장인'이 되기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좋은 'CEO'가 되기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직장인으로 살다가 독립을 하려니 시쳇말로 '멘붕'인 겁니다. 내가 주인되는 '주체적인 삶'에 대한 준비나 연습을 한번도 못해보고 살아왔던 겁니다. 이른바 명예퇴직을 맞는 많은 분들의 상황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경주마와 야생마의 비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경주마는 주어진 트랙만 열심히 달립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열심히 달리기만 합니다. 물론 보상은 주어집니다. 때가 되면 주인이 먹을 것을 챙겨 주니 오늘도 무작정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반면 야생마는 가고 싶은 곳, 마음 내키는 대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주마와 달리 내 먹을 거리는 내가 구해야 합니다. 트랙을 달릴 때는 없었던 부담이자 고통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트랙을 달릴 수 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달려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모르면 배가 아무리 불러도 모든 게 허할 뿐입니다.


어제 그 분과의 만남을 계기로 저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독립한 게 아니기에, 재미있게 살려고 독립한 것이기에 지금의 삶은 예전보다 훨씬 만족스럽습니다. 내 시간을 내가 디자인하며 사는 삶이라서입니다. 아침에 아이들 학교를 바래다주며 이야기를 나누고, 틈만 나면 가족들과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아내와도 함께 외출하는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아졌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이 주어진 일은 무조건 해야했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내가 싫은 일은 안 하면 되고 재밌는 일은 하면 됩니다. '이런 게 사는 거다' 싶은 나날들입니다. 비우고 내려놓으니 일상이 평화요, 평화가 곧 행복입니다. 천주교에서 "평화를 빕니다"라 인사하는 이유를 몸으로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뇌종양을 계기로 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그 분은 브레인 트레이너 등 관련 공부를 하며 자격증도 따고 나름의 준비를 충실히 하셨더군요. 하지만 아직은 불안할 겁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제 얘기를 해드렸습니다. 불안할 테지만 거쳐야 할 성장통이라고, 한 발 내딛는 그만큼 생각지도 못한 길과 기회들이 보일 거라고. 조급하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말라고. 가족들과 더 열심히 사랑하고 이야기 나누라고. 100세 수명 시대, 어차피 나와야 할 회사니 남보다 조금 먼저 나와 남보다 조금 빨리 시작한다 생각하라고. 1인기업의 CEO로서 이제 스스로의 삶과 일을 '경영'하라고.


사실은 그 분에게 드린 이야기라기보다는 저 스스로에게 한 이야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별 영양가도 없는 제 얘기를 연신 수첩에 적으시던 그 분, 온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두 어깨를 짓누르던 불안감이 조금은 가신 듯 해보였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좋은 성품과 능력을 갖춘 분 같아 보였기에 잘 헤쳐 나가시리라 믿습니다. 저와의 한 시간 여 만남. 스스로 주인되실 앞으로의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분과 헤어지며 속으로 가만히 되뇌었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보통마케터안병민


* 함께 읽어보면 좋은 글 : https://brunch.co.kr/@botongmarketer/183

* 함께 읽어보면 좋은 글 : https://brunch.co.kr/@botongmarketer/103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0170403 닥치고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