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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칼럼 004] ‘혁신중독’과 노자 리더십

[동아비즈니스리뷰(DBR) 연재] 안병민의 숨은 경영 찾기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각종 강의를 쫓아다니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초조함 때문에 허둥지둥 변화를 재촉하는, 이른바 ‘혁신 중독’에 빠진 기업들이 상당수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 레고도 혁신의 덫에 걸렸었다. 아이들이 게임기에 빠져 블록에 시들해지자 각종 디지털 콘텐츠 사업에 진출하고, 레고 랜드를 만들고, 수많은 사업에 손을 뻗쳤다. 하지만 정작 ‘레고다움’을 잃어버리며 외면받았고 블록이라는 기본에 집중하면서야 되살아날 수 있었다. 허둥지둥 쫓기듯 행하는 혁신은 성공할 수 없다. ‘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알고, 나와 우리가 혁신의 주인이 돼야 한다. <편집자 주>

내가 아는 준호 씨는 참 부지런합니다. 새벽마다 진행되는 독서모임 참석은 기본입니다. 지금껏 사서 읽은 책도 어마어마합니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수많은 강의도 수소문해서 찾아 다닙니다. 소셜미디어 타임라인 속 그는 누가 보더라도 입이 떡 벌어질 법한, 자기계발에 관한 한 엄청난 열정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그의 삶이 나아지는 듯한 느낌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늘 자기혁신을 실천하고 다니지만 알고 보면 그는 그저 불안할 뿐입니다. 자기계발 책을 읽고 동기부여 강의를 들어야만 마음이 편한 겁니다. 안 그러면 혼자만 뒤쳐지는 것 같은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건 중독입니다. 이른바 ‘자기계발 중독’입니다.


술이나 마약 따위를 계속적으로 지나치게 복용하여 그것이 없이는 생활이나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 ‘중독’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자기계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시작은 좋습니다. 하지만 자기계발의 과정에서 어느덧 ‘나’는 사라집니다. 자기계발 ‘주체’로서의 나는 없어지고 ‘객체’로서의 나만 남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계발을 왜 해야 되는지, 무얼 위해 하는 건지 그 이유는 잊혀지고 그저 스스로를 채찍질합니다. 날을 벼릴 생각은 않고 죽어라 도끼질만 하는 꼴이니 결과는 뻔합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귀마냥 오늘도 준호 씨는 자기계발의 학습현장을 좀비처럼 찾아 다닙니다. 중독의 폐해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런 ‘자기계발 중독’이 비단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기업도 똑같습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혁명적 변화의 시기에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 다름 아닌 ‘혁신중독’입니다. ‘혁신중독’은 ‘역량파괴적 환경변화(competence-destroying change)’의 부산물입니다. 디지털카메라 때문에 사라진 카메라필름처럼 내가 갖고 있는 나만의 차별적 강점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푸드프린터(Food Printer)를 만드는 IT기업이 순식간에 식품기업의 경쟁자로 부상하는 격변의 세상입니다. 천지개벽급의 이런 변화들이 상시화되니 기업들의 마음이 바쁘기 그지없습니다. 변해야 산다는,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초조감이 스스로를 재촉하게 합니다. ‘혁신 중독’의 발현 배경입니다.


그런 면에서 레고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레고는 1932년 설립된 덴마크 기업으로 작년 매출이 6조 2천억원에 영업이익이 2조원에 달합니다. 이런 굴지의 기업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레고 블록의 특허가 만료되고 IT 게임기가 늘어나면서 레고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이 시들해지던 90년대. 아니나 다를까 레고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더 이상 플라스틱 벽돌조각에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생각했던 레고는 다른 사업으로 눈을 돌립니다. TV프로그램과 영화 제작 등 디지털 콘텐츠 사업에 진출하고 옷과 인형, 시계도 만듭니다. ‘디즈니랜드’를 벤치마킹한 ‘레고랜드’도 이 때 문을 엽니다. 짧은 기간 동안 레고는 수많은 사업에 새롭게 진출했습니다. 레고는 이걸 ‘혁신’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건 ‘강박’이었고 결과는 ‘악몽’이었습니다. 레고의 ‘혁신 강박’ 때문에 레고의 ‘레고다움’은 외려 사라졌고 고객의 싸늘한 외면은 가속화되었습니다. 레고를 다시 일으킨 건 결국, 혁신이 아니었습니다. ‘혁신 중독’에서 벗어나 제 자리를 찾아감으로써 레고는 되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왜 바뀌어야 하는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냉철한 밑그림 없이 남들이 바꾸니 우리도 바꾼다는 건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따라 뛰는 꼴입니다. 혁신이란 미명 하에 목적지 없는 열차에 허둥지둥 몸을 실어서는 안 된다는 게 레고의 교훈입니다.


이처럼 강박에 의한 당위론적 채찍질로 이루어지는 혁신은 우리를 지치게만 할 뿐입니다. 혁신은 ‘바꾸라, 바꾸라’ 지시하고 명령하며 다그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신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전제는 말랑말랑한 조직문화입니다. 변화를 품어 안는 리더의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모든 걸 자기 생각과 경험의 틀로 판단하려는, 생각이 굳어버린 리더는 혁신의 걸림돌입니다.


그러고 보니 노자의 가르침도 혁신 리더에게 영감을 제공합니다. 노자는 ‘무위(無爲)’를 설파했습니다.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무위’는 특정 가치에 의한 판단과 기준을 모두 걷어내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여지는 대로’ 보라는, 비움과 내려놓음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을 어떤 특정한 개념과 가치에 사로잡혀서 보게 되면 사고의 유연성은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그 모든 걸 포용할 수 있습니다. 혁신도 그렇습니다. 강박적으로 뭔가를 바꾸는 게 혁신이 아닙니다. 세상의 변화를 주체적으로 품어 안아 물 흐르듯 조화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가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쫓기듯 행하는 혁신이 성공하기 힘든 건 그래서입니다.


단지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강의를 듣는다고 성장하는 건 아닙니다. 기계적 수용이 아니라 비판적 되새김질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안 그러면 혁신의 물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낙엽 신세일 뿐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을 개편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고 신규사업을 벌이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벤치마킹의 유효기간은 끝났습니다. 나와 우리가 혁신의 주인이어야 합니다.


“그만 배워라. 배우는 목적이 뭔가. 결국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배우는 데만 집중하면 거기에 빠져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돼 버린다. 평생 남의 생각을 읽고, 남의 똥 치우다 가는 거다.” ‘활동적 타성’에 젖어 오늘도 ‘혁신, 혁신’ 영혼 없는 구호만 외치고 있는 수많은 기업 현장에서도 곱씹어 봐야 할 서강대 최진석 교수님의 일갈입니다. ⓒ혁신가이드안병민    


*표지일자 2017. 10월 234호 http://dbr.donga.com/article/view/1306/article_no/8327


*글쓴이 안병민 대표(bit.ly/innoguide)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쓴 책으로 《마케팅 리스타트》, 《경영 일탈》, 《그래서 캐주얼》, 《숨은 혁신 찾기》, 《사장을 위한 노자》가 있고, 감수한 책으로 《샤오미처럼》, 《주소가 바꿀 미래사회와 산업》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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