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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코리아 020] 비우고 내려놓는 무위경영

[포춘코리아 연재] 안병민의 경영수다

*포춘코리아 2018년도 6월호에 실린 연재기획 <안병민의 경영수다> 칼럼입니다.


어지간한 재벌그룹이라면 비켜갈 수 없는 게 ‘형제의 난’입니다.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오는, 목불인견의 진흙탕 싸움 말입니다.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는 게 권력이라 하니 권력의 중독성 또한 마약 못지않습니다. 동서고금을 둘러보아도 권력에 대한 동물적 욕망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 경영에 있어 ‘경영권 승계’는 또 하나의 상수이자 변수가 되었습니다. 매끄럽게 후계구도를 잘 만들어낸 기업은 안정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반면, 승계 과정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불거져 나온 기업은 그만큼 경영 리스크가 커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GE같은 기업은 차기 CEO를 엄격한 절차와 기준에 의해 선정합니다. 별도의 위원회가 회사 내외부에서 추려 놓은 20여명의 CEO 후보자 하나하나를, 이사회가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을 통해 검증합니다. 현재의 존 플래너리 회장도 무려 6년 여의 검증과정을 거쳐 최종 낙점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경영에 있어 승계가 중요함을 보여주는 웅변적 사례입니다.


하지만 오너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대부분의 기업 경우, 승계라는 단어 자체가 ‘불경(不敬)’입니다. 오너가 경영권을 놓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경영승계’는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역린(逆鱗)’입니다. 그러다 CEO의 건강 문제 등 갑작스런 경영 공백이 발생했을 경우, 회사 전체가 혼란에 빠집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합니다. 많은 재벌기업들이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보여준 ‘형제의 난’이 그래서 생겨납니다. 마치 왕조시대 왕위 계승처럼 무척이나 전근대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승계작업을 진행하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거리의 간판과 사인물, 패널을 포함한 다양한 광고자재, 옥내외광고물과 디지털프린팅 제품들을 생산·제작·유통하는 회사 ㈜한들(이하 ‘한들’)이 대표적입니다. 1974년에 창업을 하여 ‘한들’을 키워온 손진기 창업주는 나이 예순이 되자 미련없이 경영권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경남 합천으로 내려갑니다. 철쭉으로 유명한 황매산 자락에 땅을 사서 직원들을 위한 교육과 휴양의 공간을 만들고 산과 물을 벗삼아 제 2의 삶을 즐깁니다. 착실하게 경영능력을 키워온 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긴 해도 권력의 중독성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면 범인(凡人)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이미지 출처 : 한들 홈페이지 http://bit.ly/2t5IRK2


“어차피 내가 영원히 경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물려줘야 할 텐데, 조금 이르다 싶을 때 물려주는 게 낫습니다. 그래야 후계자가 자기 스타일대로 하다가 잘못되더라도 다시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있지요. 그리고 세상이 계속 변하는데 옛날 사람이 언제까지 계속 경영을 할 수 있겠어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때가 되면 물러나 주는 게 어른의 역할이지요.”


이제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숲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손진기 창업주의 말입니다. 노자가 겹쳐 보이는 대목입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 말입니다. ‘천명(天命)’이 아니라 ‘자연(自然)’에서 우리 삶의 지혜와 질서를 찾고자 했던 노자입니다. 자연에서는 세상만물이 다 상대적입니다. 강하고 약한 게 따로 없고 좋고 나쁜 게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집니다. 여우는 토끼를 잡아먹지만 여우 또한 호랑이를 만나면 한줌 먹이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세상을 특정한 기준과 이념에 따라,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게 무위자연의 가르침입니다.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 있는 그대로, 그저 ‘보이는 대로’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이 없으니 생각이 유연해 집니다. 그 유연함이 세상의 변화를 품어 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무위자연의 철학입니다.


무위하지 못하는 리더는 항상 자신만의 기준과 경험으로 세상을 판단하려 듭니다. 하지만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세상입니다. 일분 일초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과거의 기준으로 재단하려 하니 세상과 자꾸 어깃장이 납니다. 현명한 리더는 그래서 무위합니다. 직원을, 후배를, 후계자를, 자녀를 진심으로 믿고 맡기고 기다리는 겁니다.


“후배들에게 바라는 건 없다. 그 사람의 인생이다. 나이 차이는 나도 같은 선수였으니 어떻게 보면 동등한 입장이었다. 도움을 주고 방법론을 제시해줄 수는 있지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강요하면 더 성장할 수 없다.” 대한민국 프로야구계의 전설이 되어버린 이승엽 선수의 말입니다. 역시 믿고 맡겨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후배의 성공과 성장을 내가 대신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경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경영’이 있는가 하면 ‘아들의 경영’도 있습니다. 모두의 경영이 똑같을 수 없습니다. 어느 게 맞고 어느 게 좋은 건지는 세상의 변화 흐름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리더들이 그런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버럭 화부터 냅니다. 내가 맨손으로 일구어 낸 기업인데 네가 무얼 아냐며 호통부터 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기하급수적 변화가 한창인 요즘, 세상은 그런 사람을 ‘꼰대’라 부릅니다. 필요한 때에 제대로 방황할 수 있는 것도 권리입니다. 스스로의 내공은 그런 방황의 과정을 통해 길러집니다. 모든 걸 다 챙겨주는 부모나 모든 걸 일일이 지시하는 리더는 자녀나 후배가 성장할 권리를 무참히 짓밟는 겁니다. 내 의도로 세상을 규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무위해야 변화와 마주할 수 있습니다. 무위가 곧 혁신인 겁니다.


창업주의 유연한 철학 때문인지 ‘한들’의 기업문화는 남다릅니다. ‘기업’에 대한 관점부터가 그렇습니다. 기업이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터’가 아니라 각자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삶터’여야 한다는 게 ‘한들’의 생각입니다. 이런 ‘한들’에서 얼마 전 책을 한 권 출간했습니다. 회사 대표 혼자 쓴 책이 아닙니다. 회사 동료(‘한들’에서는 직원을 ‘직원’이라 부르지 않고 ‘동료’라 표현합니다) 열 다섯 명이 함께 쓴, ‘한들’의 경영철학에 대한 책입니다. 비우고 채우고 움튼다 하여, 이른바 ‘비채움 철학’입니다. ‘삭막한 일터’를 ‘행복한 삶터’로 바꾸기 위한 ‘한들’의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여러 동료들이 마음과 뜻을 모아 이 책을 같이 만들었다는 것에 큰 자긍심을 느낀다는 손현석 대표의 서문이 인상적입니다.

이미지 출처 : 한들 홈페이지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세상을 내게 맞추는 게 아니라 세상을 품으면 내가 곧 세상입니다. ‘한들’ 손진기 창업주의 경영승계는, 그래서 ‘비우고 내려놓음’의 노자철학을 닮았습니다. 덜어내고 또 덜어냄으로써 무위에 이른다, 무위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노자의 통찰을 ‘한들’에서 다시 찾아 읽습니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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