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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 07] 남극에도 꽃은 핀다

[국제신문 연재] 안병민의 세상읽기

국제신문 2019년 12월 9일자 26면에 실린 <세상읽기> 연재칼럼입니다.


어릴 때는 ‘상상(想像)’이 장난감이었다. 새하얀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미지의 대륙 남극은 모험 가득한 상상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남극은 차디찬 ‘현실’이다. 평균 두께 2,160m인 빙하가 대륙의 98%를 뒤덮고 있다. 세계 빙하의 90%를 차지하는 얼음의 땅이다. 겨울 7~8개월 동안 해가 뜨지 않고, 여름 2~3개월 동안 해가 지지 않는다. 만년설의 바다로 둘러싸인 대륙, 남극이다. 


그런 극한의 환경을 온몸으로 겪어 낸 이가 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 윤호일 소장이다. 남극 세종기지 월동(越冬)연구대장을 지낸 윤소장은 지난 20여년 세월동안 남극기지를 제 집 드나들 듯했다. 남극은 한번 투입되면 1년 동안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맹장을 떼 놓고 간다. 혹시 있을지 모를 탈을 대비해서 미리 맹장을 제거하고 들어가는 거다.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는 남극 생활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이른바 ‘정신줄을 놓는’ 대원들도 나온다. 상황 인식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지는 거다. 사고는 그럴 때 발생한다. 그렇다고 이런 직원을 내보낼 수도, 내보낼 곳도 없다. 윤소장은 생각을 바꾸었다. 직원들의 장점만 봤다.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대원들을 불러서 칭찬했다. 모두를 품고 가야 하는 리더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얼음칼’이 빗발치는 폭풍설에 고립됐을 때 리더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원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공포다. 포기하고 싶지만, 그래도 리더에게 묻는다. 언제 구조대가 오는지. 이틀이란 시간은 남극의 여름에서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치다. “별 일 아니다, 곧 구조대가 온다. 걱정 마라.” 하지만 희망고문은 반복된다. 그렇게 48시간이 지난다. 한계지점이다. 이때 리더가 ‘몇 시간만 더 참으면 된다’고 설득하면 부하들이 견딜까? 아니다. 이때부터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눈 앞의 상황만 모면하려 하다가는 결국 나락이다. 위기일수록 소통은 원활하고, 메시지는 명확해야 한다. 머뭇거리면 늦다. 최악의 상황까지 감안한 명확한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으로 표현되는 역량파괴적 환경변화가 한창이다. 천 길 낭떠러지가 도처에 가득하다. 윤소장이 이야기하는 위기의 리더십이 궁금했다. “위기 때 조직을 움직이는 리더십? 다른 것 없다. 정직이다. 크레바스 탐사를 나갔을 때 내 결정으로 모두가 몰살당할 뻔한 상황이 있었다. 대원들은 대장인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부대장이 내게 얘기했다. “대장님, 간접적으로라도 사과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1년을 더 지내야 합니다.” 나는 직급과 권위를 등에 업고 항변했다. “나는 가이드라인에 따랐다. 잘못한 것 없다.” 다음날부터 모든 리더십이 부대장에게 넘어갔다. 나는 완장만 차고 있었지 아무 힘을 쓸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위기 극복의 리더십, 그 으뜸은 정직이었다.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흔쾌히 인정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두 번째는 균형감각이다. 조직엔 늘 모자란 사람이 있다. 이들을 외면하고 강한 부하들로 생산성을 높이는 건 진정한 리더십이 아니다. 뒤처진 사람을 자른다고 끝이 아니다. 뒤처지는 사람은 또 나온다. 그들을 계속 자르면? 마지막 순간, 나를 지켜줄 부하가 없다. 윤소장은 역설한다. 리더십은 뒤처진 자가 일어설 수 있는 여건과 기회를 마련해 주는 균형감각이라고.


남극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연평균 온도가 영하 23도. 겨울엔 영하 80도까지 내려간다. 1년 평균 강수량이 200㎜에 불과해 ‘얼음 사막’이라고도 불린다. 바람도 강하다. ‘블리자드(blizzard)’라 불리는 눈보라가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친다. 그런 극지의 극한상황에서도 꽃은 핀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아우르는, ‘리더십’이란 꽃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향은 심연처럼 깊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걷고 있지만,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위기에도 꽃은 핀다. 그리고, 피어야 한다. ⓒ혁신가이드안병민



*국제신문 2019년 12월 9일자 26면 <세상읽기> 연재칼럼 http://bit.ly/2DWsaqa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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