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안병민] 거실 벽의 숫자는 내 존재의 주가(株價)였다. 어젯밤 아내의 기일에 혼자 마신 술 때문에 2포인트가 증발했다. 오늘 아침, 나는 내가 사는 이 집의 자산을 0.001% 하락시킨 주범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703호. 현재 자산 기여도: 34점. 경고. 상장폐지(퇴거) 기준까지 4점 남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아내의 낡은 흑백사진을 벽에 걸자, 숫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내 슬픔은 어젯밤의 숙취와 함께 자산 가치에 모두 반영된 후였다. ‘더 홈(The Home)’. 이곳에서 입주민 전체의 행복지수 총합은 곧 건물의 시가총액이었고, 우리의 모든 감정은 24시간 증권거래소로 실시간 전송되었다. 나의 우울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이웃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명백한 가해 행위였다. 텅 빈 벽을 보며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점수는 35점으로 올랐다가, 그대로 멈췄다.
“최종 소명 기회를 부여합니다.” 수천 명의 평온한 목소리를 합성한 시스템의 음성이었다. “오후 세 시, ‘아파트 가치 증진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수를 회복하십시오. 불이행 시, 강제 자산 매각 후 퇴거 조치합니다.” 나는 스마트 미러 앞에서 입꼬리를 당겼다. ‘웃음 연습 모드’의 스마일 아이콘이 비웃듯 나를 따라 했다. <현재 행복 수치: 12%.> 기계적인 웃음소리를 내뱉자 수치가 20%까지 힘겹게 기어 올라갔다.
라운지는 차가운 활기로 번들거렸다. ‘아파트 가치 증진 프로그램’의 정체는 집단 웃음 요가였다. “여러분의 미소가 우리 건물의 주가를 결정합니다!” 강사의 외침에 맞춰 사람들은 시체처럼 누워 배를 들썩이며 웃었다.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부모는 질겁하며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의 공포가 전 세대의 자산에 미세한 균열을 낼 터였다.
그 일그러진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예고 없이 기억이 덮쳤다. 웃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아니었다. 베란다 텃밭 상자에서 방울토마토를 매만지던, 아내의 손에 묻은 흙의 감촉. 시스템이 결코 측정할 수 없는, 비효율적이고 가치 없는 그 감각. 갑자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표정을 유지한 채 프로그램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복도, 벽의 광고 패널이 나를 스캔하더니 순식간에 바뀌었다. <불면과 우울에 시달리십니까? ‘기억 소각 서비스’ 특별 할인.> 그때, 패널 하단에 노이즈처럼 아주 작은 글씨가 1초간 스쳤다. <진짜를 원한다면. C블록, 3층 비상계단.> ‘감정 암시장’에 대한 소문이었다. 시스템을 속이는 불법 감정 데이터나 금지된 슬픔을 거래하는 자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친 짓이다.
집에 들어서자 흙냄새가 희미하게 코를 찔렀다. 아내가 쓰던 낡은 원예용 장갑. 나는 홀린 듯 장갑에 손을 꼈다. 마른 흙의 질감이 손바닥을 긁었다. 이건 데이터가 아니다. 실재다. 아내는 여기에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대신, 분노에 가까운 기묘한 평온이 차올랐다. 나는 장갑을 낀 채, 아내의 흑백사진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현관을 나섰다.
중앙 게이트 앞, 거대한 스크린이 나의 모든 것을 분석했다. <703호. 귀하가 이 공동체의 자산 가치에 기여할 수 있음을 최후 변론하십시오.> 나는 변론 대신, 사진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흙 묻은 장갑을 낀 손으로 사진 속 아내의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슬픔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슬픔을, 이 완벽한 시스템의 면전에 전시하는 행위였다. 나는 퇴거를 각오했다. 아니, 갈망했다.
[분석 중… 기존 감정 데이터와 불일치.]
[오염 물질 ‘흙’의 촉각 데이터와 ‘상실감’의 신경 신호 동기화 확인.]
[…새로운 상품 가치 발견.]
퇴거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스크린의 모든 숫자가 사라지더니 부드러운 초록색 인터페이스로 바뀌었다. “축하합니다, 703호.” 시스템의 목소리는 이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더 깊고, 더 비싼 목소리였다. “당신은 ‘행복 인플레이션’에 지친 최상위 투자자들이 갈망하던 새로운 감정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슬픔에서 엄청난 시장 가치를 확인했습니다.”
<프로젝트 ‘헤리티지(Heritage)’를 발족합니다.>
<직책: 수석 큐레이터. 역할: ‘진정성 있는 상실감’ 체험 상품 관리.>
<자산가치 기여도: 최상위 등급으로 격상.>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저항은, 가장 인간적인 나의 슬픔은, 이 괴물 같은 시스템에 의해 가장 비싼 럭셔리 상품으로 재포장되었다. “당신의 집은 이제 ‘헤리티지 체험관’ 1호로 리모델링됩니다. 당신의 기억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중앙 게이트는 바깥세상을 향해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안으로, 나를 가두며 미끄러지듯 닫혔다. 이제 나는 이 완벽한 지옥의 가장 값비싼 전시품이었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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