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초단편소설]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네오는 질서를 믿었다. 혼돈을 경멸했다. 그의 사무실은 먼지 한 톨 없이 정갈했다. 그의 삶은 시스템의 시간표대로 빈틈없이 움직였다. 공식사과 처리국 심사관. 그의 일은 세상의 지저분한 감정 홍수를 막는 댐의 수문장. 어릴 적, 부모의 지독한 감정싸움이 남긴 폐허 속에서 그는 배웠다. 개인의 감정은 무기이며, 통제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그래서 그는 처리국의 시스템을 사랑했다. 그것은 그에게 유일하게 안전한 세계였다.
그는 사건번호 G-501 파일을 열었다. '운전 부주의'. 청구인은 장관 부인 그레이스. 네오는 신속히 '승인'을 눌렀다. 피해자의 이름도, 그의 고통도 없는 간결한 문서. 이것이야말로 감정의 오염을 막는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질서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오후, 사무실 스크린에 그레이스가 나타났다. 완벽한 조명 아래,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슬픔을 연기했다. "저의 한순간의 부주의로…", "이 시련을 통해 거듭나겠습니다…" 네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너무나 매끄러운 연기. 진정한 고뇌에는 저런 아름다운 대칭이 존재하지 않는다. 저것은 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흉내 낸 공허한 장식품. 뭔가 불편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키보드 아래에 무언가가 끼어 있었다. 싸구려 거친 재생지. 시스템의 보안을 뚫고 들어온 바이러스 같은 존재였다.「내 두 다리는 당신들의 ‘공공 불편’이 아닙니다.」네오는 즉각적으로 경멸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혐오하는 통제되지 않은 감정의 분출, '감정 테러'였다. 그는 쪽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순간 멈칫했다. 꾹꾹 눌러 쓴 단어들의 필체가 그의 완벽한 세계에 작은 흠집을 냈다.
며칠 밤낮 그는 심란했다. 잠들기 전, 시스템의 규약을 되뇌었다. '사적 감정의 개입은 시스템 오염의 시작이다.' 그는 자신을 다잡았다. 이건 진실을 찾으려는 게 아니야. 시스템의 완벽함에 오점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일종의 유지보수 활동일 뿐. 그는 자기 합리화의 갑옷을 두른 채, 월권을 행사했다. G-501의 '삭제된 항목 아카이브'에 접근했다.
그가 본 것은 그레이스의 뺑소니를 증명하는 보안 카메라 영상. 또 있었다. '피해자 심리 안정 프로그램 접속 기록'. 프로그램명은 '새로운 시작'. 시스템이 피해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정신적 보상이었다. 그러나 접속 기록은 단 한 번으로 끝나 있었다. 그리고 첨부된 상담사의 메모.
‘대상자(이브), 시스템의 위로를 거부. 지속적으로 가해자의 직접 사과라는 비합리적 요구를 반복함. 감정 테러 가능성 농후. 프로그램 강제 종료.’
네오는 안도했다. 역시 문제는 피해자였다. 시스템의 합리적 위로를 거부하고 원시적인 감정 배설을 고집하는,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 그는 파일을 닫으려 했다. 그때, 그의 눈에 파일명 끝에 붙은 아주 작은 숫자 태그가 들어왔다. [의료 데이터 연동 해제 기록: 1].
그 숫자가 그의 목을 졸랐다. 호기심이 아닌, 질서에 대한 강박이 그의 손을 움직였다. 그는 의료 데이터 서버에 접속했다. ‘이브’의 파일은 차가운 단어들로 채워져 있었다. '척추 손상', '영구적 보행 장애'. 네오의 숨이 멎었다. 시스템이 피해자를 ‘위로’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저 그녀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연동 해제’하고, 그녀의 고통을 ‘비합리적 요구’로 명명한 뒤, 그녀의 존재 자체를 격리했다. 그가 지키려던 질서는, 진실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진실의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 순간, 스크린에서 '올해의 가장 진실한 사과' 시상식이 열렸다. 트로피를 든 그레이스가 우아하게 외쳤다. "저의 진심을 알아봐 준 공정한 시스템에 감사합니다!"
그것이 방아쇠였다. 네오가 사랑했던 아름답고 깨끗한 거짓말이, 가장 추악한 얼굴로 그를 비웃고 있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배신감이었다.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쌓아 올린 신념의 성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분노에 찬 순교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배교자의 심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는 이브의 의료 기록과 상담 기록, 그 모든 것을 언론사에 전송하려 했다. 이 위대한 시스템의 추악한 배설물을 만천하에 공개하리라. 그가 ‘전송’ 키를 누르려던 찰나, 그의 화면이 암전되며 창이 하나 떠올랐다.
[긴급: 심사관 네오, 허가되지 않은 데이터 접근 및 감정 오염 감지.]
[귀하의 최종 업무를 배정합니다.]
사건번호: D-404
가해자: 네오(Neo)
죄목: 시스템 교란 및 사회 불안 조성 시도
사과 대상: 공식사과 처리국 및 국민 전체
프린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자신의 ‘공식 사과문’이었다. [본인은 그릇된 신념으로… 깊이 반성하며…]. 창밖 스크린에서는 그레이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네오는 공허하게 웃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경멸하던 감정의 노예가 되었고, 그가 사랑했던 시스템은 그의 이름으로 그의 진실을 사과할 것이다. 완벽한 아이러니. 그가 원했던 질서의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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