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마지막으로 본 것

건너편의 눈

by 새보음

프롤로그: 마지막으로 본 것



나는 보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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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장 로비의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11월의 샌프란시스코. 이 도시의 비는 폭우가 아니라 공기 자체가 젖어드는 것에 가까워서 우산을 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매번 애매했다. 나는 펴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이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비를 맞으며 걷는 자기 자신이 좋았다. 이천 명 앞에서 강연을 마친 뒤 빗속을 혼자 걸어가는 사람. 그 이미지가.


정직하지 못한 고독이었다. 연출된, 통제된, 언제든 끝낼 수 있는 종류의.


하지만 그건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Market Street의 가로등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번지고 있었다. 물웅덩이마다 도시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데, 차가 지나갈 때마다 그 도시들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 물리학인지 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그 중간쯤의 것.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풍경이 눈에 닿으면 분석이 먼저 시작되고, 분석이 끝나면 의미를 붙이고 싶어졌다.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야 직성이 풀렸다.


대학 2학년 심리학 수업에서 '주지화'라는 단어를 배웠을 때 알았다. 아, 이게 나구나.


감정이 올라오면 이름을 붙였다. 이름을 붙이면 괜찮아졌다. 괜찮아지면 다시 일할 수 있었다. 이 순환이 너무 효율적이어서 멈출 이유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Moscone Center에서 발표한 것은 메모리 브릿지의 세 번째 임상 결과였다. 스크린에 재생된 것은 알츠하이머 말기 환자의 뇌에서 복원한 기억이었다. 여든셋의 버지니아 할머니. 그녀가 열아홉이던 여름의 미시간 호수. 복원된 이미지 속에서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앞줄에 앉은 딸이 울었다.


나는 그 울음을 들으면서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 하나는, 아 이것이 아름다운 순간이구나, 라고 느끼는 것. 다른 하나는, 감정적 반응 강도를 미디어 노출 효과로 환산하면 FDA 승인 일정에 유리하겠다, 라고 계산하는 것.


나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감동할 줄 알면서도 냉정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나였다.



그게 정말 나였을까.



빗방울이 안경에 맺혔다. 세상이 일그러졌다가 렌즈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함께 다시 선명해졌다. Mission Street 방향으로 걸었다. 이 거리에는 두 개의 시간대가 있었다. 1970년대에 간판을 올린 세탁소, 태국 식당, 99센트 가게들의 퇴색한 형광등. 그 사이에 끼어든 BCI(뇌-컴퓨터 인터페이스) 클리닉의 홀로그램 Upgrade Your Hearing $29/month. 인간의 감각을 월정액으로 파는 시대. 그 광고판 아래를 보청기도 없이 걸어가는 노인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솔직하게 적어야 한다 - 나는 노인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보다, 그 장면의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퇴색한 간판과 홀로그램의 대비. 비에 젖은 거리의 쓸쓸함과 기술의 화려함이 한 프레임에 담긴 것. 나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를 분석하지 않으면 소유한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노인은 내 풍경의 일부였다. 내 사유의 재료였다.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기술이었다. 어머니의 기억이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본 이후로, 나에게 세상은 하나의 문제였고 기술은 하나의 답이었다. 감각의 격차? 기술이 아직 충분히 확산되지 않아서 생기는 일시적 현상이다. 인터넷이 처음에는 소수의 것이었다가 결국 모두에게 닿은 것처럼.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으면 양심이 편했다. 기술 낙관주의는 비용이 적다.


Market Street와 3rd Street의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안 해도 되는 계산을 했다. 적색 파장 620 나노미터에서 녹색 파장 530 나노미터로의 이동. 원추세포의 반응. 시신경의 전달. 시각피질 V1의 처리. 전두엽의 판단. 약 150밀리초.


세상을 이런 식으로 분해하는 것이 좋았다. 분해하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두렵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이 그녀로부터 나를 앗아 갔을 때도 나는 분해했다. 해마의 위축. 콜린성 뉴런의 퇴행. 아밀로이드 플라크의 축적. 이름을 붙이면 괜찮아졌다. 견딜 수 있었다. 아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발을 내디뎠다. 횡단보도 중앙쯤에서 고개를 들었다. 도시가 거기 있었다. Salesforce Tower가 안개 위로 솟아 있었고, 그 아래로 SoMa의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비에 씻긴 채 서 있었다. 유리 커튼월에 반사된 도시가 두 겹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실재하는 도시와 반사된 도시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잠시 헷갈리게 만드는 야경이었다.


아름다웠다.


왜 그 순간 그 단어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름답다'는 판단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측정이 안 되니까. 하지만 그 순간 - 안경에 맺힌 빗방울 사이로 굴절된 도시의 불빛이 내 눈에 닿던 그 순간 - 분석이 먼저 오지 않았다. 그냥 아름다웠다.


피로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강연 뒤의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면서 방어기제도 함께 느슨해진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내 뇌가 어떤 것을 측정 불가능한 방식으로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차장은 강연장 뒤편, Howard Street 쪽이었다.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빗소리가 달라졌다. 큰 도로의 빗소리가 백색소음이라면, 이 골목의 빗소리에는 리듬이 있었다. 비상 계단의 철제 난간을 두드리는 소리. 환기구에서 올라오는 김과 함께 퍼지는 중국 음식점의 마늘 냄새. 배수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


나는 이 감각들을 등록하면서도 진짜로 느끼지는 않았다. 뇌가 처리했지만 몸까지 닿지는 않았다. 나는 늘 감각과 나 사이에 한 겹의 유리가 있는 것처럼 살았다. 모든 것이 보이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는. 그 유리가 나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했다.


골목 끝의 가로등이 주황빛 원을 바닥에 그리고 있었다. 그 원 안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면 찰나의 왕관 모양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왕관.



여섯 살. 인디애나. 비 오는 오후. 현관에 나란히 앉아서 물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가리켰다.


"봐, 다르시. 왕관이야. 비가 왕관을 만드는 거야."


나는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분해했다. 물의 표면장력과 운동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코로나 스플래시 현상. 직경 약 2밀리미터의 빗방울이 시속 20킬로미터로 수면에 충돌할 때 형성되는 크라운 형태의 비산(飛散). 인지과학에서는 이것을 교차양상 기억 활성화라고 부른다. 가로등의 주황빛이 시각 기억을 자극하고, 시각 기억에 연결된 청각 기억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소환하는 것.


이름을 붙이면 괜찮아진다.


이름을 붙이면 울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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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탔다. 대시보드가 목적지를 물었다. 끄고 수동 모드를 눌렀다. 시동을 걸었다. 와이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유리의 물줄기가 둘로 갈라지고 그 너머로 큰 도로의 불빛이 금빛 띠처럼 번져 있었다. 101번 고속도로. Palo Alto까지 삼십 분. 야간의 베이쇼어 프리웨이는 빛의 회랑이었다. 가드레일의 반사판이 헤드라이트를 받아 리듬을 만들었고, 왼편으로 만(灣)의 수면이 공항의 불빛을 머금고 어둡게 호흡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쇼팽의 녹턴이 흘러나왔다. Op. 9, No. 2. 왼손의 아르페지오가 빗소리와 겹쳤다. 나는 이 우연의 조합을 음미했다. 비와 쇼팽과 야간 운전. 나는 이런 순간을 좋아했다. 무언가 완벽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 완벽함을 인지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좋은 순간.


사실은 세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 음악을 듣고, 도시를 보고, 운전을 하는 - 단 하나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 감탄하는 것.


앞차의 브레이크등이 빨갛게 들어왔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미끄러졌다. 빗길. 수막 현상. 마찰계수의 급락. 물리학이 의지를 이기는 순간.


이후의 것들은 프레임 단위로 남아 있다.


스티어링이 의미를 잃었다. 관성이 몸을 밀었다. 안전벨트가 가슴을 눌렀다. 사이드미러에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비정상적인 각도로 확대되었다. 그 빛이 세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밝기로 시야 전체를 삼켰다.


유리가 깨졌다.


깨진 유리 너머로 가로등이 보였다. 주황색. 둥근. 어머니가 보여준 빗방울 왕관과 같은 색. 그것이 유리 파편 사이로 만화경처럼 번졌다. 주황, 주황, 주황. 수백 개의 주황색 원.


그리고 줄어들기 시작했다.


주변부부터 어두워졌다. 이미지가 가장자리부터 수축하며 중앙의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주황색 원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소리가 커졌다.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 빗소리. 경적. 소리의 세계가 팽창하면서 빛의 세계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것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가로등 하나였다.


시야 정중앙에 놓인 주황색 점. 세상의 모든 빛이 그 한 점에 있었다.


그것이 꺼졌다.





어둠.



완전한 어둠.



소리만 남았다.





빗소리. 먼 경적. 달려오는 발소리. 내 심장 소리.


나는 눈을 떴다. 감았다. 다시 떴다. 차이가 없었다.


손이 얼굴을 더듬었다. 눈이 거기 있었다. 열려 있었다.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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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몰랐다. 보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행위인지.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