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빛의 제국]
사람을 처음 만나면 눈을 본다.
습관이었다. 누군가와 악수를 하면서 나는 상대의 눈동자 색, 동공의 크기, 공막의 혈관 분포를 무의식적으로 스캔했다. 홍채의 패턴은 지문만큼이나 고유하다. 65억 개의 가능한 조합. 나는 사람을 기억할 때 이름보다 눈을 먼저 떠올렸다. 마거릿의 옅은 회색 눈. 데이비온의 짙은 갈색 눈 - 늘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의 눈은 사진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 검정에 가까운 갈색이었다. 인디애나의 여름 밤하늘 같은 색이라고 어릴 적에 생각했었다.
눈은 언어였다. 가장 정직한 언어. 입은 거짓말을 하지만 동공은 하지 못한다.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동공이 확장되고, 빛이 아닌 감정에도 반응한다. 나는 그것을 읽는 데 능숙했다. 회의실에서 누가 내 제안에 진심으로 동의하는지, 누가 단지 위계에 의해 고개를 끄덕이는지를 나는 눈으로 판별했다.
적어도 그렇다고 믿었다.
.
.
.
아르티스 세이를 처음 만난 것은 2039년 가을, CORTEX가 Series B를 마감한 직후였다. MIT에서 열린 신경과학 심포지엄. 나는 메모리 브릿지의 초기 결과를 발표하러 갔고, 그녀는 "The Reorganized Brain: Visual Cortex Without Visio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러 왔다.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이름을 봤을 때는 특별한 인상이 없었다. 비시각적 인지. 흥미로운 분야이긴 했지만 내 연구와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다. 나는 기억을 다루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감각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다른 세션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데이비온이 전화를 해서 투자자 미팅이 30분 당겨졌다느니, 보드 구성원 중 하나가 불만이 있다느니 그 통화가 예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다른 세션의 시작을 놓쳤고, 가장 가까운 강의실에 들어갔다.
아르티스의 강의실이었다.
자리의 절반 정도가 차 있었다. 메인 세션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뒷줄에 앉았다. 무대 위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보통 키의 첫인상을 정리하려는데 멈칫했다. 그녀의 눈이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프로그램을 다시 확인했다. 아르티스 세이, Ph.D. Congenitally blind researcher.
선천성 시각장애인.
나는 그때, 솔직해져야 한다, 흥미가 아니라 관찰 욕구를 느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발표를 하는지. 어떤 도구를 쓰는지. 청중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나는 과학자였고, 눈앞에 연구 대상이 나타나면 관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연구 대상.
그때의 나는 그 단어가 얼마나 오만한지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오만함을 인지하는 것과 오만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일이다.
아르티스가 말하기 시작했다.
"시각은 독재자입니다."
첫 문장이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고른 편이었는데, 발표자의 훈련된 목소리라기보다는 원래 그런 톤인 것 같았다. 마이크 없이도 뒷줄까지 닿는 종류의 목소리.
"인간의 뇌는 감각 정보의 약 80퍼센트를 시각에서 가져옵니다. 시각피질은 뇌 전체 면적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요. 뇌의 자원 배분으로 보면, 시각은 다른 모든 감각을 합친 것보다 많은 대역폭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슬라이드가 바뀌었다. 그녀는 슬라이드를 보지 않았다. 당연히. 손에 든 작은 리모컨을 누를 때마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타이밍이 정확했다. 내용을 모두 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진화적 이점이었습니다. 포식자를 발견하고, 먹이를 추적하고, 동료의 표정을 읽는 데 시각만큼 효율적인 감각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독재 때문에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나는 등을 기대고 있었다. 지적으로 흥미로운 도입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주장은 종종 감상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듣는 법을 잊었습니다' 같은. 나는 그런 결론을 예상하고 있었다.
"제 뇌에는 시각피질이 있습니다. 크기도 정상이에요. 하지만 이 피질은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빛을 처리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뇌는 이 거대한 영역을 다른 용도로 재배치했습니다."
슬라이드에 두 개의 뇌 MRI 스캔이 나란히 떴다. 하나는 정상 시각을 가진 피험자, 하나는 아르티스 자신의 것이었다. 활성 영역이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정상 뇌에서 시각피질은 시각 자극에만 반응했다. 아르티스의 뇌에서 같은 영역이 촉각, 청각, 공간 인지에 모두 반응하고 있었다.
"이것이 cross-modal neuroplasticity, 교차양상 신경가소성입니다. 시각이 없으면 뇌는 비어 있는 시각피질을 다른 감각에 할당합니다. 단순히 '다른 감각이 좋아진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시각피질의 연산 능력(패턴 인식, 공간 매핑, 시간적 처리)이 다른 감각에 적용되면서 질적으로 다른 인지가 가능해집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것은 감상이 아니었다. 데이터였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천성 시각장애인의 청각적 공간 정위 능력은 정상 시각인의 평균 대비 2.4배 정밀합니다. 촉각적 패턴 인식은 1.8배.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것은 시간적 처리 능력입니다. 청각 자극의 시간적 미세 구분에서 선천성 시각장애인은 밀리초 단위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정상 시각인의 역치보다 4배 이상 정밀합니다."
숫자. 나는 숫자에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2.4배. 1.8배. 4배. 이것은 보상 메커니즘이 아니었다. 증강이었다.
아르티스는 다음 슬라이드로 넘겼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시각피질의 재배치는 '결핍에 대한 보상'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최적화'인가?"
그녀가 잠시 멈추었다. 멈춤이 1.5초 정도 이어졌는데, 그녀는 그 사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발표자는 빈 시간을 채우려고 한다. '음' 이라든지 '자' 라든지. 아르티스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 동안 청중이 질문의 무게를 느끼도록 놔두었다.
"의학은 전자로 봅니다. 장애를 '치료'해야 할 결핍으로 정의하니까요. 하지만 제 연구 데이터는 후자를 지지합니다. 시각 없이 자란 뇌는 열등한 뇌가 아닙니다. 다르게 조직된 뇌입니다. 그리고 그 '다름'이 특정 영역에서는 시각 뇌를 압도합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밝은 회색이었다. 수정체의 색소가 결여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느 방향도 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시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방향이 있었다. 머리의 기울임, 턱의 각도, 몸의 무게 중심. 그녀는 청중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청중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보는 것과 향하는 것. 그때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이 시작되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왜 들었는지는 분석해보면 지적 호기심 40퍼센트, 자기 과시 40퍼센트, 나머지 20퍼센트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달시 태드, CORTEX입니다."
내가 이름을 말했을 때 아르티스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나를 아는 것 같았다. 물론 알 것이다. 이 분야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무언가를 확인한 것에 가까웠다. 아, 그 사람이 여기 있구나. 그런 종류의.
"교차양상 재배치 데이터가 인상적입니다. 질문이 있는데 이 재배치된 시각피질의 연산 패턴이, 원래의 시각 처리 패턴과 구조적으로 유사한가요? 그러니까, 시각피질이 촉각을 처리할 때도 시각 처리에 쓰이는 것과 같은 신경 회로 구조를 사용하는 건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구조가 형성되는 건지."
좋은 질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르티스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녀가 말할 때 시선이 아닌 몸 전체가 내 쪽을 향했다. 의자에서 돌아앉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자세에서 상체가 미세하게 회전하는 것이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그리고 대답은 '둘 다'입니다. 기본 구조(칼럼 단위의 처리, 위계적 추상화)는 유지됩니다. 하지만 그 위에 시각 처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연결 패턴이 형성돼요. 비유하자면, 같은 공장에 다른 생산라인을 깐 거예요. 건물 구조는 같지만 만드는 것이 다른."
"그러면 이론적으로, 재배치된 피질에 시각 신호를 다시 주입하면 두 가지 처리가 동시에 가능할 수도 있겠군요."
나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시각피질이 촉각도 처리하고 시각도 처리할 수 있다면 이것은 IRIS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시각피질이 외부 카메라 데이터를 자체적으로 시각 이미지로 변환하는 것. 그 변환 과정에서 교차양상 재배치의 메커니즘을 활용할 수 있다면.
아르티스가 대답하기 전에 잠깐의 사이가 있었다. 0.8초. 나는 그 사이를 그녀가 답을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판단이었다. 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적으로 가능하죠. 하지만 그건 '동시 처리'가 아니라 '간섭'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재배치된 피질은 이미 최적화가 끝난 시스템이에요. 거기에 새로운 입력을 강제로 넣으면 기존의 감각 체계가 교란될 수 있어요. 촉각을 통해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 갑자기 시각을 받으면, 두 세계가 충돌해요."
"충돌을 관리하면 되지 않을까요? 자극의 강도와 타이밍을 조절해서, 간섭을 최소화하면서 두 채널을 병렬로 —"
"관리한다는 전제가 이미 시각 중심적이에요."
아르티스가 말했다. 목소리의 톤은 변하지 않았다. 공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확했다.
"당신은 지금 시각을 '추가'하는 것이 개선이라고 가정하고 있어요.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제 뇌가 34년 동안 구축한 감각 체계는 시각의 부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에요. 시각 없이 완성된 것이에요. 거기에 시각을 '추가'하는 것은 개선이 아니라 재설계에 가까워요. 그리고 재설계의 결과가 원본보다 낫다는 보장은 없죠."
나는 답변을 준비하면서 그녀의 표현을 머릿속에서 분해했다. '시각 중심적'이라는 비판은 학계에서 흔히 접하는 것이었다. 장애학(disability studies) 쪽에서 자주 나오는 프레임. 나는 그 프레임을 존중하되 동의하지는 않았다. 기술은 객관적이다. 시각이라는 감각 채널을 복원하거나 증강하는 것은 가치 판단이 아니라 기능의 문제다. 자동차에 후진 카메라를 추가하는 것이 '전진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는 것처럼.
이 비유가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당시의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제 관심은 선천성 시각장애인의 뇌에 시각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피질의 가소성 메커니즘을 이해하여 후천적 시각 상실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시각을 가졌다가 잃은 사람의 시각피질은 아직 시각 처리의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괜찮은 답변이었다고 생각했다. 논점을 우회하면서도 그녀의 비판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 데이비온이라면 이것을 "우아한 회피"라고 불렀을 것이다.
아르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인지 접수인지 알 수 없는 끄덕임이었다.
"그렇겠죠. 후천적 상실은 다른 문제니까요."
그리고 다른 질문자에게로 넘어갔다.
나는 그녀의 논문을 그날 밤 호텔에서 읽었다. 전문을. 두 번. 처음에는 데이터를 확인하기 위해, 두 번째는 무언가가 걸렸기 때문이다. 논문 어딘가에. 논문의 전제 자체에. 하지만 무엇이 걸리는지 정확히 짚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시야의 맨 가장자리에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은데 고개를 돌리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비슷했다.
지금은 안다. 걸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르티스의 논문은 시각이 없는 뇌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논문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 메커니즘을 시각 복원에 활용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그녀가 "다름"을 증명한 것을 나는 "도구"로 읽었다. 그녀의 뇌가 하는 일을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뇌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데이터를 내 프레임에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아주 오래 몰랐다.
.
.
.
아르티스를 CORTEX에 스카우트한 것은 그로부터 4개월 후였다.
내가 직접 이메일을 썼다. 보통은 데이비온의 인사팀이 하는 일이었지만, 이건 내가 해야 했다. 그녀의 연구가 필요했다 - 메모리 브릿지의 다음 단계, 즉 감각 기억의 교차양상 복원에 핵심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IRIS의 가능성을 아직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구상이었지만 그녀의 데이터가 뒷받침해줄 수 있었다.
이메일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당신의 뇌가 하는 일을 이해하면, 우리는 모든 감각을 재설계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아르티스가 말했다. 그 문장 때문에 한 달을 고민했다고. "재설계"라는 단어가. 자기 뇌가 하는 일을 "이해"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것이. 하지만 결국 왔다. CORTEX에.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틀렸다는 걸 안에서 증명하는 게 밖에서 비판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니까요."
나는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까지 2년이 걸렸다.
.
.
.
2041년 10월의 그 화요일. 오후 4시. 아르티스와의 미팅.
임상 세션과 IRIS 검토 회의를 마치고 올라온 나는 어깨가 무거웠다. 마거릿의 세션은 좋은 결과를 냈지만, 윌리엄의 세션은 예상대로 부진했고, IRIS 검토 회의에서는 팀원들의 반응이 내가 원하는 만큼 열광적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에너지를 소모시켰다. 특히 열광적이지 않은 반응이. 나는 열광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자각하고 있었다. 자각한다고 해서 중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티스의 사무실은 2층 연구실의 동쪽 끝에 있었다. 일반 사무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조명이 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설치되지 않았다. 그녀가 입사할 때 시설팀에 요청한 것이었다. "제 사무실의 조명을 제거해 주세요. 창문은 냉난방을 위해 필요하지만, 블라인드는 내려 두겠습니다." 시설팀은 당혹스러워했고, 나는 그 요청을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에너지 절약이라고.
아르티스는 나중에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조명이 없으면 사람들이 제 사무실에 들어올 때 잠깐 멈춰요. 적응하는 동안 평소보다 주의를 기울이게 되죠. 제가 매일 하는 일을 3초 동안이나마 체험하는 거예요."
나는 그것을 교육적 장치로 이해했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라고. 그것이 '교육'이 아니라 '초대'라는 것은 아직 몰랐다.
문을 두드렸다.
"달시."
내가 노크한 것을 소리로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른 것은 발소리인지, 노크의 리듬인지, 아니면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의 무언가인지. 나는 이것이 궁금할 때마다 물었고, 아르티스는 매번 다른 대답을 했다.
"오늘은 커피 냄새."
"커피?"
"점심때 리필을 안 했죠? 아침에 내린 것이 식은 냄새가 나요. 이 건물에서 그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다들 Philz에서 사 오니까."
사실이었다. 나는 연구실 코너에 있는 드립 머신의 커피를 마셨다. 습관이었다. 박사과정 때부터.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커피를 사러 나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시작한 것이 14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나인지 아는 건 무리가 있지 않아?"
"그것만은 아니죠. 걸음 간격이 0.72미터 정도. 오른발이 왼발보다 약간 무거워요. 그리고 복도에서 멈칫하는 지점이 있어요. 내 사무실 앞에 올 때 속도가 줄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두운 방 앞에서 속도가 줄지만, 당신은 내 사무실 앞에서만 그래요."
나는 의자에 앉았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면서 윤곽이 드러났다. 아르티스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끝에 TouchRead 패드가 있었고, 한쪽 귀에 Aria의 이어피스가 보였다. 아니 보였다는 것은 부정확하다. 희미한 빛(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캘리포니아의 오후 햇살)에 적응한 뒤에야 그 윤곽들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방에 들어오면 나는 항상 어깨가 조여들었다. 조금. 시각에 의존하는 비율이 내 경우에는 체감 90퍼센트 이상이었는데 급격히 줄어들면서 나머지 감각이 보상적으로 활성화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전환의 순간이 불쾌했다. 통제가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아르티스는 이 방에서 완벽하게 편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세계였다. 나는 그녀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 간단한 사실이 왜 그렇게 오래 걸려서 이해가 되었을까.
"IRIS 검토 어떻게 됐어요?"
아르티스가 물었다. TouchRead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녀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하는 데 능숙했다. 읽으면서 듣고, 듣으면서 방의 공기 변화를 감지하고. 시각이 차지하지 않는 대역폭이 다른 모든 것에 분배되어 있었다.
"반응이 미적지근했어."
"예상했어요."
"왜?"
"당신이 아직 핵심을 증명하지 못했으니까요. '뇌가 스스로 이미지를 생성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아름다운데, 어떻게 외부 데이터를 뇌의 내부 언어로 번역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빠져 있어요. 팀이 미적지근한 게 아니라 당신이 아직 풀지 못한 거예요."
직접적이었다. 아르티스는 항상 그랬다. 나에게 우회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많았다. 데이비온조차 비즈니스적 이해관계가 걸린 것이 아닌 한 내 아이디어에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아르티스는 달랐다. 그녀에게 내 위계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이것을 존경했다. 그리고 약간 불편해했다. 존경과 불편은 공존할 수 있다.
"그래서 너한테 온 건데."
"알아요."
"네가 가진 데이터가 필요해. 교차양상 재배치의 실시간 매핑. 시각피질이 비시각적 입력을 처리할 때의 신경 경로 데이터. 그걸 역설계하면 외부 시각 데이터를 뇌가 '자기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코덱을 설계할 수 있어."
아르티스가 의자를 돌려 내 쪽을 향했다. 정확히 내 쪽. 그녀는 시선 없이도 정확한 방향을 향할 수 있었다. SonarSense가 내 위치를 알려주는 것인지, 청각만으로 충분한 것인지, 나는 아직 구분하지 못했다.
"내 뇌의 데이터를 써서, 다른 사람의 뇌에 시각을 만들겠다는 거죠."
"그렇지."
"제 뇌가 시각 없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해서, 그 역을 구현하겠다는 거네요."
"정확해."
말이 없었다. 3초. 아르티스의 침묵에는 종류가 있었다. 생각하는 침묵, 판단하는 침묵, 기다리는 침묵. 이것은 세 번째인 것 같았다. 내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기다리는.
하지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데이터 접근 권한은 줄 수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뭔데?"
"나도 IRIS 프로젝트에 참여할게요. 데이터만 주는 게 아니라, 설계에 관여하겠다는 뜻이에요."
"물론이지. 네가 참여하면 —"
"그리고." 아르티스가 말을 끊었다. "내가 반대하면 멈출 수 있어야 해요."
나는 웃었다. "네가 반대하면 멈추는 프로젝트라니, 우리 회사에 그런 프로토콜은 없는데."
"없으니까 만들자는 거예요."
"아르티스, 난 —"
"달시."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있었다. 시선 없이 부르는 이름.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부르는 것과 질감이 달랐다. 눈으로 나를 확인하면서 부르는 이름은 이미 나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름이 확인의 도구였다. 아르티스가 내 이름을 부를 때, 이름은 탐색이었다. 소리를 보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는.
이 차이를 나는 등록했지만 중요하다고 분류하지 않았다.
"당신은 시각을 되돌려주는 기술을 만들려고 해요.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 기술을 설계하는 사람이 '시각이 없는 상태'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면, 설계에 맹점이 생겨요. 문자 그대로의 맹점이요."
"그래서 네가 참여하는 거잖아."
"그래서 내가 반대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나는 동의했다. 쉽게. 그 조건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아르티스가 반대할 일이 올 것이라고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아이디어가 옳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확신.
나는 그 단어를 많이 썼다. 확신, 확실, 분명, 명확. 측정 가능한 것들에 대한 확신.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쓰는 단어들.
아르티스는 '확실하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가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은 "그럴 수도 있겠네요"였다. 확정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세계를 열어두는 사람.
나는 확정하는 사람이었다. 세계를 정의하고 측정하고 닫는.
문을 닫는 사람과 문을 열어두는 사람이 같은 프로젝트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의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
.
.
미팅이 끝나고 아르티스의 사무실을 나오면 항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복도의 형광등이 눈에 들어오면서 세상이 갑자기 과잉 선명해지는 것. 어둠에 적응했던 동공이 수축하면서 모든 것이 날카롭게 다가온다. 복도의 비상구 표지판의 초록빛, 소화기의 빨간색, 바닥 타일의 회색 그라데이션. 어둠 속에 있다가 빛으로 나오면 세상이 너무 많았다. 정보가 과다했다. 시각이 다른 모든 감각을 삼켰다. 아르티스의 사무실 안에서 잠깐이나마 선명해졌던 공기의 온도, 커피의 잔향, 의자의 삐걱거림 - 그런 것들이 빛 아래에서 다시 사라졌다.
나는 이 현상을 매번 경험했다. 그리고 매번 잊었다. 2~3초 후에 동공이 적응하면, 세상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아는 정상. 보는 것이 지배하는.
아르티스는 이 '정상'에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다. 그녀의 정상은 내가 3초간 경험하고 잊어버리는 그 세계 - 소리와 온기와 공기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세계 - 그것이었다.
이 간단한 사실을 나는 2년 동안 매일 3초씩 경험하고 매번 잊었다.
보는 사람의 한계가 거기에 있었다. 보이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것. 눈이 열리면 귀가 닫히고, 코가 닫히고, 피부가 닫힌다. 시각의 독재. 아르티스가 첫 발표에서 말한 것.
나는 그 발표를 듣고 감탄했었다. 데이터가 훌륭하다고. 논리가 정교하다고.
정작 나 자신이 그 독재의 가장 충실한 신민이라는 것은 보지 못했다.
보는 사람이었는데.
.
.
.
오후 5시. 데이비온과의 미팅은 다음에 적겠다.
아르티스에 대해 쓰려 했다. 그리고 쓰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는 아르티스에 대해 쓰면서도 결국 나에 대해 쓰고 있다. 아르티스의 연구를 나의 프레임으로 읽었듯, 아르티스라는 사람도 나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하게 만들고 있다.
아르티스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36년간의. 시각 없이 세계를 구축해온 36년. 나는 그 이야기를 물어본 적이 없다. 그녀의 데이터는 물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이것도 같은 것인가. 사람을 이해하는 대신 사람의 데이터를 이해하는 것. 차이를 알면서도 편한 쪽을 택하는 것.
나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눈을 보았다.
아르티스를 만나면서도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밝은 회색 눈. 어디도 보지 않는 눈. 그 눈을 관찰하면서 무엇을 알았을까. 아무것도. 동공의 크기도, 공막의 혈관 분포도, 홍채의 패턴도 아르티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평생 써온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눈의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아르티스가 있었다.
.
.
.
그리고 나는 아직 다른 언어를 배울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