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초의 세계가 무너진 순간
아이는 진수의 복제품이 아니었다. 진수와 수연이 만들었으나, 이제 막 0의 자리에 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고유한 우주였다.
분만실의 공기는 양수처럼 묵직하고 아늑했다. 조도를 한껏 낮춘 호박색 조명이 방 안을 둥그렇게 감쌌고,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직한 분무음이 창밖의 빗소리와 섞여 마치 깊은 동굴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아늑한 백색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진수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수연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후우, 후우... 이제 다 왔어. 수연아, 조금만 더.”
시간은 점액질처럼 끈적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의료진의 차분한 지시, 기계가 그리는 규칙적인 심박동의 전자음, 그리고 수연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 비현실적인 리듬을 만들어냈다. 진수는 수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그 으스러질 듯한 통증만이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는 유일한 닻이었다.
“산모님, 마지막이에요. 길게, 더 길게 힘주세요! 머리 다 나왔어요!”
의사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수연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다. 그것은 비명이라기보다, 자신의 온 존재를 열어젖혀 새로운 우주를 뱉어내는, 태고의 호흡에 가까웠다.
팽팽하던 공기가 일순간 정지했다. 찰나의 진공 상태. 그리고,
“으앙—!”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선언이었다. 하나의 세계가 막을 찢고 다른 세계로 침범해 들어오는 파열음. 그 날카로운 울음은 진수의 고막을 때리고, 뇌의 논리 회로를 거치지 않은 채 곧장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진수는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라면 0.5초가 필요했을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고, 맥락을 분석하고, 적절한 안면 근육을 움직여 반응하기까지의 그 지겨운 시차. 이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뼈에 새겼던 그 서글픈 눈치의 시간.
하지만 지금, 그 견고했던 0.5초의 방어벽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논리가 들어설 틈도 없이 눈물이 터졌다. 어떤 예고도 없이,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진수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시야가 흐려진 채로 그 붉고 작은 생명체를 응시했다.
“아빠, 이쪽으로 오셔서 탯줄 자르실게요.”
의료진이 가위를 건넸다. 진수는 떨리는 손으로 가위를 받아 들었다. 수연과 아이를 연결하고 있는 생명의 줄.
서걱.
가위질의 감각은 섬뜩할 만큼 생생했다. 무언가 질긴 것이 끊어지는 느낌.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인 분리가 아니었다. 진수의 내면에 깊게 박혀 있던 유전의 공포를 끊어내는 의식과도 같았다. 나의 우울이, 나의 불안이, 나의 비겁함이 이 아이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의식.
탯줄이 잘리고, 간단한 처치를 마친 아이가 드디어 수연의 품에 안겼다.
“아가...”
방금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수연의 얼굴에 기묘한 성스러움이 깃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젖은 등을 감싸 안았다. 작고 붉은 생명체가 엄마의 살내음을 맡으며 본능적으로 울음을 그치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연결은 너무나 완벽해서, 진수는 감히 그 사이에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벅찬 숨만 몰아쉬며 바라보았다.
“오빠, 손 좀 줘봐.”
수연이 젖은 눈으로 진수를 불렀다. 진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이의 작은 손 근처에 검지 손가락을 대었다. 그 순간, 아이의 작은 주먹이 허공을 휘젓더니 진수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아...’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그 작은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맥박이 진수의 손가락을 타고 심장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그것은 언어가 필요 없는 대화였다.
‘나는 당신과 연결되어 있어요. 나는 당신의 실패작이 아니에요. 나는 그저 나예요.’
진수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에게 투영될 자기 자신이었음을. 이 아이는 진수의 복제품이 아니었다. 진수와 수연이 만들었으나, 이제 막 0의 자리에 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고유한 우주였다.
“... 지후야.”
진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이 아늑한 분만실 공기 중에 부드럽게 섞여 들었다. 수연과 진수, 그리고 지후. 세 사람의 이마가 맞닿았다. 서로의 체온이 섞이는 순간, 진수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거대하게 팽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진수의 세계는 좁고 어두웠다. 수연과 단둘이 웅크리고 숨어 있던, 외부로부터 차단된 방공호. 그곳은 안전했지만 고립되어 있었고, 따뜻했지만 늘 산소 부족에 시달렸다. 세상은 벽 밖에 있었고, 진수는 늘 벽 안에서 떨었다.
하지만 이제 지후라는 존재가 그 벽을 녹이고 있었다.
아니, 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경계선은 여전히 존재했다. 진수는 여전히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할 것이고, 회사에서는 종종 투명 인간 취급을 받을 것이며 영원히 한국인도, 캐나다인도 아닌 어정쩡한 회색 지대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계선은 이제 단절의 절벽이 아니었다.
진수는 수연의 품에서 쌔근거리며 잠든 지후를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는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자라날 것이다. 진수에게 그것은 고통이었지만, 지후에게 그것은 두 개의 날개가 될 수도 있다.
경계에 서 있다는 것. 그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0이라는 숫자가 양수와 음수를 모두 포용하는 기준점이 되듯이.
진수는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의 불안을, 자신의 어설픔을, 자신의 모호함을.
‘그래, 나는 흔들리는 사람이다.’
흔들리기 때문에 유연할 수 있다. 굳어버린 시멘트가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 흔들림이 있었기에 수연을 만났고, 이 작은 0의 우주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자신이 밟고 서 있는 이 위태로운 경계선이 사실은 지후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마당이 될 수도 있음을 그는 처음으로 상상했다.
진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구름이 찢어진 틈으로 희미한 오후의 햇살 한 줄기가 젖은 창가로 스며들었다. 빗물 맺힌 유리창에 빛이 닿자, 무채색의 회색 도시에 찰나의 무지개가 어렸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경계선 위에서 색채들이 번져나갔다.
여전히 날은 흐렸다. 하지만 그 흐린 풍경 속에 이제는 분명한 온기가, 그리고 시작을 알리는 0의 좌표가 찍혀 있었다. 진수는 지후의 이마에, 그리고 수연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계산도 강박도 없는 순수한 본능의 입맞춤이었다.
그의 우주가 경계 너머로, 조용히, 그리고 거대하게 확장되고 있었다.
밴쿠버의 긴 밤, 당신이 건넨 온기 한 잔. 이방인의 삶은 때로 서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커피 한 잔은 글을 써 내려가는 제게 가장 든든한 난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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