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평가, 그리고 표현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자극
쇼펜하우어의 말 1 :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평가, 새로운 개연성이 필요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뜻밖에도 ‘은퇴’를 떠올렸다.
마흔 하나. 아직 한창 일할 나이다.
그런데도 나는 은퇴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끝나면 나는 누구로 남을 것인가.
직함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했다.
아마추어 작가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여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
그저 내가 나를 그렇게 불러보기로 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자리 대신 다른 역할을 택했고,
숫자와 일정만 보던 자리에서 실무를 더 깊게 들여다보는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은 승진을 위한 전략이라기보다
내 삶의 개연성을 바꾸기 위한 시도에 가까웠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앙은 위로라기보다 질문이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의지로 사는 인간인가, 맡겨진 존재인가.
새로운 이름을 붙여보고,
새로운 평가 기준을 세워보고,
새로운 공동체에 나를 던져보는 일.
그 모든 선택이 결국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새로운 인생은
환경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는다.
나는 앞으로 또 어떤 개연성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어떤 서사로 내 삶을 설명할 것인가.
쇼펜하우어의 말 2 : 독서는 나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자극이다.
자극만 받고 이를 표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자극에 무뎌진다.
이 문장은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과거 나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독서였다.”
그만큼 책 읽기를 좋아했다.
밑줄을 긋고, 문장을 옮겨 적고, 감상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책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그 문장들처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읽었다는 사실만 남겨둔 채
다음 자극을 찾아가고 있는가.
철학자 최진석 교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늘 “생각하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남의 생각을 빌려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기 삶에서 한 발 물러난 것이라고.
나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 경제, 신앙, 리더십.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과
그 기준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책은 나를 흥분시켰지만,
현실은 나를 시험했다.
읽을 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결정의 순간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체면, 안전을 먼저 계산했다.
그 간극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르게 해보려 한다.
읽은 문장을 흘려보내지 않고
한 번쯤은 삶에 대입해보기로.
독서가 자극이라면
표현은 책임이다.
이 연재는 그 책임을 조금이나마 감당해보려는 시도다.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평가를 세우고,
읽은 문장을 실제 선택에 대입하는 일.
그 모든 것이 이미 내 안에 있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더 미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