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다시 묻다
이 연재는 쇼펜하우어의 편역서를 읽으며 시작되었다.
*편역서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원전을 읽은 것이 아니라, 편역 된 책을 읽었다.
편역자가 골라낸 문장들, 다듬어진 표현들.
처음에는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곧 생각이 달라졌다.
편역서는 사상을 완성된 체계로 보여주기보다,
멈춰 서야 할 문장을 먼저 건네준다.
원전이 숲이라면,
편역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는 표지판에 가깝다.
나는 그 표지판 앞에서 자주 멈췄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쇼펜하우어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의 질문을 내 삶에 대입해 보았다.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평가가 내 안에 있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철학자의 의도를 해설하기보다 지금의 내 역할을 떠올렸다.
조직 안에서의 직함,
가족 안에서의 위치,
내가 붙들고 있던 자의식과 허영.
체면과 권위,
공동체와 평균에 대한 문장들은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나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던 생각들을 드러냈다.
동시에 몇몇 지점에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을 근원적 불행으로 보는 시선,
의지를 거의 절대화하는 태도.
그것들은 나의 생각과 겹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그 다름이 오히려 사유를 확장시켰다.
철학적 질문에 답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점검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안다고 믿는 것들은 실제 삶에서 얼마나 쓰이고 있는가.
특히 종교를 갖게 되면서 생긴 세계관은
쇼펜하우어의 비관적 질문에 또 다른 재료를 제공해 주었다.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
고통의 의미,
사랑의 본질.
나는 이미 나름의 언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언어가 과연 내 삶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고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철학은 그 지점을 찔렀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 연재를 시작하려 한다.
쇼펜하우어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의 문장을 빌려 나의 기준을 다시 묻고 싶기 때문이다.
기술과 숫자,
일정과 책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사유를 외주화 하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문장 앞에서 내가 멈췄는지,
왜 그 문장이 불편했는지,
그리고 그 불편함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기록해보려 한다.
편역서를 읽었지만,
결국 내가 다시 읽은 것은
철학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