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장애로부터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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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는 이제 누구나 아는 흔한 질병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공황장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솔직히 이야기하기도 하고 평범한 사람들도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정신질환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 누구나가 내가 된 2014년 가을을 잊을 수 없다. 남들의 경험은 남의 것, 그것이 나의 것이 되면 '올 것이 왔다'며 자연스럽게 치료를 받기란 아직도 어려운 정신적인 질병이다. 게다가 삶을 지속해야 할 변명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워킹맘은 이런 질병은 사치이다. 완치가 어렵다는 이 장애를 나는 어쩌다 갖게 되었을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1. 공황장애의 원인이 시작되다.
제주도의 국제 학교에서 2012년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기간제 교사로 10년 가까이 일하면서 겪은 계약직의 설움과 불확실성은 나의 낮은 자존감의 주된 이유가 되었다. 앞으로의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급기야 교장선생님이 바뀌면서 급여는 절반으로 낮아졌다. 별도 급여가 지급되는 방과 후 수업을 하지 못하게 하고 정규 수업에만 참여하게 바뀌었다. 한 달에 두 번의 월급을 받던 나름 괜찮던 직장이었는데, 같은 시간을 일하면서 급여가 50% 급감하게 되었다.
치즈가 옮겨졌다. 나는 그들만의 리그로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임용고시를 볼 것인지의 여부를 심각하게 고려할 때쯤 국제학교 채용 공고를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교육 대학원 시험과 국제학교 면접을 거의 같은 시기에 치렀고, 나는 대학원에 성적 우수 장학생으로 국제학교에는 행정직으로 합격했다. 나는 이미 미술 중등교사 2급 자격증, 캐나다 유아교사 자격증, 테솔 자격증이 있었다. 그러나 정규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 2년을 공부하고 또 기약 없는 임용고시를 봐야 한다.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지만 30대 후반이라는 내 나이가 두려웠다. 그러던 차에 국제 학교 합격이라는 새로운 문이 열린 것이다. 급여가 훌륭하진 않지만 국제학교 정규직에 취업하게 된 것이 어쩌면 나의 올바른 길이라 생각하여 나는 과감히 제주행을 선택했다.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내려가기엔 너무나 무모한 나의 모험으로서의 취직이었다. 주중에 제주에서 근무하고 금요일이면 서울로 올라오는 주말 가족을 시작했다.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5시 땡 할 때를 기다려 지문을 찍고 퇴근해 제주시에 있는 공항에서 6시 30분 김포행 항공편을 타야 한다. 공항 가는 길은 무척이나 심장이 쫄깃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속도 카메라가 있는 구간을 외워야 하고 큰 트럭이 느리게 기어가는 편도 일 차선 구간에선 중앙선 침범 추월쯤은 가뿐한 기본기가 있어야 한다. 신호가 걸렸을 때 옆 도로로 우회하지 않으면 만나는 신호등마다 빨간불에 걸리게 되는 마법 같은 구간도 있다. 악명 높은 노형동 5 거리를 운 좋게 잘 지나오면 5시 40분쯤 공항 주차장에 도착한다. 공항 바로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신호등만 건너면 공항 수속을 밟을 수 있다. 주차비는 나중에 내려와서 고민한다. 그렇게 김포 공항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경. 아이들은 잠을 자지 않고 엄마를 기다린다. 그리고 일요일 점심을 먹으면 다시 제주도로 내려갈 짐을 싸야 했다.
그렇게 나는 매주 서울행을 감행하며 주말 맘이자 국제학교의 직원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2. 자발적 주말 맘의 내적 갈등
외국에서 9년 가까이 살아온 덕으로 영어는 자신이 있었다. 새로 배우는 행정 일도 어렵지 않았다. 기간제 교사로 일할 때 나름 익혔던 행정업무가 도움이 될 줄이야. 육지 것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직원들과도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차 금액과 교통비는 급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국제학교 경력을 쌓기 위한 나의 처절한 바람으로 나는 정신없이 분주하고 슬픈 삶을 지속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주말을 보내고 제주도로 내려오는 일요일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듯 슬픔의 루프 속에 갇히게 된다. 초등 1, 5학년 남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의 삶을 부모님께 의탁하고 내려가야 하는 일요일이 되면 어린 딸은 엄마 옆구리에 붙은 젖은 가랑잎이 되고 아들은 속상함을 감추려 목소리가 되려 커지고 씩씩해진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집을 나설 땐 일부러 밝은 목소리,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눈다.
" 금요일에 일찍 올게~"
제주행 비행기에는 관광객만 타는 것이 아니다. 나처럼 아이들을 떼놓고 울기 직전의 마음으로 직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제주행 비행기는 언제나 왁자지껄 즐거운 여행자들로 가득 찬다. 나는 그 비행기 안에서 관광객도 제주도민도 아닌 '육지 것인 제주 직장인'으로 비행기를 타야 했다.
제주공항에 내려 주차해둔 차를 찾고 주차비를 정산하고 공항을 빠져나온다. 차가운 차의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40여분을 운전해 집으로 가면서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다가 웃다가 했다. 이 시간이면 내가 전화할 걸 아는 친구와 정신없이 수다를 떨거나, 친하지도 않은 직장 동료의 안부를 묻는 척 전화를 걸어 직장 욕을 한다. 아이들에게는 되도록 전화를 하지 않는다. 미안한 마음이 앞설 것이고 눈물이 날 것이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나 자괴감에 빠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3. 공항에서 시작한 공황장애
그날도 어김없이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쿠팡, 티몬 등 저렴한 항공 특가를 판매하는 웹사이트에서 한 달 분의 항공권을 구매하다 보면 항공사, 출발시간 등을 적어놓지 않고는 헷갈려서 제대로 탑승을 할 수 없다.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항공권 예약 수첩(사실은 끄적거린 종이)을 체크하니 오늘은 저가 항공으로 저녁 8시에 제주도로 내려오는 비행기다. 또 울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탑승했고 비행기 앞문이 닫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 가기 싫다는 생각에 잠겨 울음을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머릿속에 '가지 말자, 그냥 내리자!'라는 구체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 비행기가 이륙하면 나는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활주로를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급히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숨을 쉬지 못하겠다고,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다고 나만 내려주라고 부탁했다. 눈물 콧물을 쏟고 간절히 부탁하는 나의 손을 붙잡아 준 스튜어디스는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본 둣한 차분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뉴얼을 읽듯 나를 내려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닫혔던 문을 열면 나만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탔던 사람들도 다시 수속을 밟아야 한다. 내가 내린 자리 주변 폭발물이 있는지 철저히 검사한 후 이륙해야 하므로 많은 사람들의 출발이 지연된다는... 따뜻한 물을 가져다준 스튜어디스가 나를 설득하는 사이 비행기는 이륙했고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쪼그린 상태로 옆을 지켰다. 아까까지 죽을 것 같이 뛰던 심장은 포기를 배웠는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경험한 이 무서움을 혼자서 참아내야만 했다. 승무원의 말처럼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은 공포는 그저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내 일이었다. 내가 선택한 주말 가족이니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나의 처절한 삶처럼.
옆에 앉아 있던 승객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마디 한다. " 비행기 처음 타봐요? 괜찮아요."
옆좌석 아저씨가 나름 위로라는 것을 하려고 말을 건넸다. 나에겐 한 마디 위로도 되지 않았다. 13시간씩 비행해야 도착하는 외국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뭐 하겠는가. 그에게 나는 비행기를 처음 타서 무서움에 떠는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나도 처음 느낀 이 공포를 말하면 그는 이해할까?
4. 도움을 얻다.
그 후 나는 공황장애 증상이 자주 생겼고 그 대부분은 공항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나에게 공황장애가 아니라 제주도에 가기 싫어 생긴 '공항장애'가 아니냐고 했지만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편이 아닌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오는 김포 공항 활주로에서만 일어나는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공포의 루프인 주말 엄마의 삶이, 마음대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는 비행기 안의 공포감과 함께 힘을 더해 공황장애 같은 두려움을 낳았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주말마다 공항에 가야 했고 비행기를 타는 순간을 떠올리면 심장이 아파지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항공기 탑승 직전에 문 앞에서 돌아 나오거나, 누군가 같이 내려가 줄 사람이 있어야만 탑승이 가능할 때도 있었다.
죽음에서 헤어 나오려는 심정으로 나는 신경정신과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정신병원의 문을 열고 도움을 청하러 가게 되는 순간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늘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남자 같은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라 이런 나약한 나를 발견한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선택한 주말 맘으로서의 삶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므로 병원과 타협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의사는 이러한 일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약이 그 상황을 도울 수 있을 것이고, 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지가 될 거라고 했다. 그 후 처방을 받은 약을 가방에 넣어두고 탑승을 했다. 증상이 올라올 때 할 수 있는 복식호흡을 배웠고 증상이 생기면 약을 먹고 호흡을 했다. 대부분은 약을 먹으면 졸리고 잠을 자게 된다. 그렇게 나는 내가 선택한 고통의 삶 중에 생긴 내 몸의 울부짖음을 달래었다.
워킹맘으로 살다 보면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큰 무게로 다가온다. 때로는 누군가 내 짐을 좀 나눠갖고 나는 일에 집중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결혼하지 않고 싱글로 승승장구하는 친구를 부러워 한 때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주말 맘이라는 루프를 선택하고 커리어를 쌓으려고 노력한 이유는 바로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그 아이들이 슬퍼하는 일을 내 욕심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말이다.
아이들을 제주도로 전학시키기로 결심한 이후 나의 공황장애 증상은 점점 사라졌다.
함께 비행기를 타면 아이들은 내가 불안해하는 순간을 알아채고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약을 먹는 순간은 점점 줄었고 그렇게 '공항장애' 증상은 사라졌다.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으로 생긴 공황장애는
아이들의 사랑으로 치료되었다.
5. 공황장애를 이기는 삶
아파본 사람만 아는 그 공포감은 20여분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약을 먹으면 졸리고 잠을 자게 된다. 공황장애로 죽지 않는다고 누누이 들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죽을 것 같다. 죽음의 길이 눈앞으로 달려온다.
나는 공황장애의 루프에서 빠져나왔다. 공황장애가 생기게 된 환경을 바꾸었고 마음을 달랬으며 약이 필요한 때를 인정했다. 지금은 하노이에서 아이들과 함께 거주하며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한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근무한다. (아이들은 싫어하는 부분이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지 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나 감사하다. 때로는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손가락도 까딱하기 힘든데 밥을 차려야 하고 아이들 때문에 속상한 때도 많다. 그러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며 사는 삶에 늘 감사 일기를 쓴다. 돌이켜 보면 제주도에서의 근무 경력이 이곳 하노이로 나와 나의 가족을 이주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된 터라 나의 그 눈물 나는 희생은 그 값을 톡톡히 했다. 공황장애로 인해 나는 나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발견했다.
가끔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려고 할 때 나는 생각한다.
괜찮아, 아플 수도 있어.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았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의지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이길 수 있어.
난 엄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