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ing in the 삼재
삼재는 인간에게 9년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삼재가 들었다 하면 재수가 없을까 봐 어떻게든 피할 재간을 찾는다. 신앙인인데도 삼재라는 소리를 듣고 나면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삼재 때문인가 가슴이 철렁한다. 나는 워킹맘으로 자녀를 양육하면서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삼재를 경험했다. 옷을 태워 묻거나 부적을 쓰지 않아도 삼재를 지나가는 방도를 산 경험으로 터득했다. 뒤돌아 보면 삼재는 나를 강한 워킹맘으로 성장시켰다.
내가 처음 삼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건 결혼 전 친구를 따라간 점집에서다. 29살에 삼재가 끼었으니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삼재를 무시하고 씩씩하게 결혼을 했다. 남편이 너무 좋았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빨리 이루고 싶었다. 외국에서 첫 아이를 낳고 나는 남편의 자그만 회사에 직원으로 취직했다. 손주가 태어나자마자 상의도 없이 직장을 그만두시고 영국으로 오신 시어머니가 기꺼이 아이를 돌봐주셨다. 나는 그렇게 처음은 자발적이었지만 나중엔 등 떠밀린 워킹맘이 되었다.
1. 첫 번째 재난- 직장맘의 모유수유
WHO는 적어도 생후 1년까지는 아이의 주된 영양 공급원은 모유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마의 편의 때문에 일방적인 단유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걸 모르는 직장맘도 있겠나? 그렇다면 엄마의 사정 때문에 하는 단유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것인가? 독한 마음을 먹고 유축기를 마련해 직장에서 모유를 모은 후 수유를 하는 직장맘을 지원하는 추세라 한다. 그러나 한번 유축기를 돌리려면 15분은 족히 걸린다. 하루에 몇 번을 나가야 하는 직장인을 반가워하는 직장은 없다. 게다가 유축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 직장 또한 드물다. 그렇게 직장맘은 퉁퉁 부은 가슴이 있어도 아이에게 수유하는 것을 포기한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알면서도 포기해야 하는 첫 번째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
나는 아이를 낳고 일 년간 모유수유를 했다.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근무 중에 젖이 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담을 하다가도 팽 젖이 도는 때가 있다. 수유 패드를 다 적시고도 옷 밖으로 티를 낸다. 그럴 때면 아이의 밥 달라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자동으로 모유를 짜는 기계를 가슴에 대고 있으면 영낙없이 젖 짜는 소가 된 기분이 든다. 유두는 또 어찌나 아픈지 퉁퉁 불고 갈라져도 아이가 칭얼대면 먹여야 한다. 모유수유를 하며 좋은 점은 가슴이 빈약해서 늘 고민이었던 내가 팽팽한 자신감으로 차 지낸 것 하나. 남편의 한국 출장이 잦아지고 모유수유 기간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문제는 아이가 옆에 있으면 떼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칭얼대는 아이를 두고 땡땡하게 부은 가슴을 어찌 열어젖히지 않을 수 있으랴. 내일 출근은 해야 하는데 우는 아이를 그저 안고만 있을 수 있는 엄마가 몇이나 될까.
끝내 나는 아이를 한국에 두고 먼저 영국에 들어와 젖을 뗄 수 있었다. 퉁퉁 분 가슴은 건드리기만 해도 아팠다. 약을 먹어도 이틀간은 앓아누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가진 직장인의 첫 번째 고난을 이겨냈다. 내 자신감이었던 가슴은 원래보다 더 작아졌다.
2. 두 번째 재난 - 초등 1학년 엄마
한국에 들어와 둘째를 낳고 분가를 했다. 다행히도 엄마 같은 어린이집 원장님을 만나 두 아이를 모두 맡길 수 있는 호재를 얻었다. 막상 귀국해 보니 나의 영국에서의 경력은 어디 내어놓을 것도 못 되었고 애 둘 딸린 경단녀가 되어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시작해야 했다.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경제적 여건이 악화된 상황에 남편의 봉급만을 바라고 살 수 없었다. 아이들을 돌보며 할 수 있는 직장은 많지 않았다. 사는 지역을 멀리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어린이집에서 5시까지 아이들을 돌봐주어 5시 전에 끝나는 영어 기간제 교사로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영어로 먹고사는 아줌마 선생님이 되었다.
그 호사도 잠시,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1학년은 등교 초기 적응기간에 11시 30분에 하교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린이집에서 하루 종일 잘 적응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아이는 초등학교 적응기간을 다시 거쳐야 한다. 나는 8시 30분까지 출근을 해야 하고 아이도 8시 30분까지 학교에 등교해야 한다. 아이 학교 앞에서 내 학교까지 운전해서 20분. 나는 아침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아이를 내려주었다. 그래도 교문 밖에 던져 놓듯 내려주고 바삐 운전해 가는 나를 향해 아이는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학원을 알아보고 이리저리 뺑뺑이를 돌려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받았다. 아이는 수업이 끝나면 점심은 학교 앞 김밥집에서 해결했다. 다행히 급식 후 하교하는 기간이 곧 와서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스스로 챙겨야 하는 직장맘의 씩씩한 아이가 되었고 김밥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게 되었다. 학원비와 어린이집 비가 내 월급을 능가했다. 그래도 나는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다. 경단녀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알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을 넘기지 못하면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분주한 삶을 참아내면 아이가 자라고 그렇게 직장맘의 두 번째 고난이 지나간다.
3. 세 번째 재난 - 아이의 사춘기와 엄마의 갱년기의 대결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워킹맘은 한시름 놓는다. 직장에서 꽤 입지도 생긴다. 아이들은 간식도 스스로 사 먹고 학원도 곧잘 다닌다. 친구가 더 소중해지고 엄마가 벌어서 주는 용돈이 더 반갑다. 일하는 엄마는 모두 갖고 있는 죄책감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것도 잠시, 워킹맘은 폭풍의 눈에서 나와 또다시 맞을 고난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의 사춘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사춘기는 시기도 다르고 표출 방법도 다르다. 몸과 마음이 어른이 되어가는 가는 시기, 어른으로 대접받기 원한다.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것은 예쁘게 봐줘야 한다. 차려준 밥을 함께 식탁에서 먹어주면 황송하다. 그들만의 동굴에서 쑥과 마늘 대신 핸드폰과 컴퓨터를 가지고 웅녀 웅남이 되는 것을 지켜봐 줘야 한다. 사춘기라는 이유만으로 당당한 아이들을 참아내야 한다.
나의 갱년기 따위는 안중에 없는 남편은 아이들의 버릇없음을 엄마 탓으로 돌린다. '얼마 번다고 '의 셈은 늘 곱하기 제로다. 나는 갱년기라는 제2의 태풍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데도 존재감은 '0'이다. 아무리 나에게 무언가를 곱해도 끝내 나에게 돌아오는 보람은 없다. 하루에도 기분이 수십 번 널뛰기를 해도 직장에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또 다른 가면을 써야 한다. 그래도 이 험난한 직장맘 역할을 계속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4. Dancing in the 삼재
누구나의 인생은 다 값지다. 이 세상에 태어나 그 몫을 다해 살아가려는 노력에는 늘 불행이 따른다. 그 불행이 너무나 버거워 부적 같은 편법을 갖고 싶은 때도 많다. 모두 다 9년마다 삼재가 온다지만 나는 언제나 그 안에서 사는 것 같다. 그럼에도 워킹맘으로 인생을 살아내려면 9년 만에 온다는 누구나의 삼재 따위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복에 덤으로 따라오는 삼재(세 가지 고난)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고난을 거쳐 엄마로서 성숙해지며 사회인으로 보람된 인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시기가 되면 직장에 다니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아이들의 찬사를 받는 날이 온다. 반드시 그날이 온다. 인생은 늘 고난의 연속이지만 내가 사랑으로 피 흘려가며 거둔 아이들이 바르게 서는 그날을 본다. 아이들은 둥지를 떠날 것이고 나는 직장에서 자식 같은 신입사원들을 사랑으로 거두는 상사가 될 것이다.
나는 질풍노도의 삶을 거쳐온 선배로서 태풍의 거센 바람을 이제 막 맞고 있는 워킹맘의 등을 받쳐줄 수 있는 여유 있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삼재를 지나온 어른 맘들이 많아지면 우리 아이들이 자랄 세상이 더욱 따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 속에서 춤을 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워킹맘은 삼재 안에서 춤추는 여유를 배운다. 그것이 자랑스러운 워킹맘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