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엄마, 엄마는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됐었을까?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세상이 떠미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거겠지. 엄마는 점점 총명한 눈빛을 잃고, 말하는 시간보다 멍하니 창밖을 보며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졌어. 아빠가 엄마를 보러 올라오시는 날이면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뭔가를 꼭 싸오셨지. 눈도 잘 안 보이시는 노인이 무슨 음식을 만드셨겠어. 간호사가 외부 음식을 드시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도 아빠는 정체모를 음식이나 과일을 엄마 입에 한 수저씩 정성껏 떠 넣으셨어.
일주일에 한 번 주섬주섬 먹을 것을 싸서 올라와 한 시간도 안되어 서둘러 내려가시는 아빠가 난 그렇게 미웠어. 평생을 팔 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와 딸만 낳은 벌로 죗값을 치르느라 큰 소리 한번 못 내고 평생을 외롭게 사신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그저 일주일에 한 시간 이라니. 엄마는 늘 아빠 앞에서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그 음식을 잘도 받아 드셨어. 나는 아는데.... 엄마가 아빠를 원망하며 산 그 세월을.. 엄마는 치매라는 지우개로 그 원망을 다 지우고 사랑만 남겼지. 잠시라도 눈을 떼지 못하고 아빠를 보며 웃는 엄마를 보면 다 기억나도록 조근조근 자세히 이야기해주고 싶었어. 엄마가 그렇게 사랑만 했던 사람이 아니라고, 엄마에게 늘 상처만 주던 자랑할 것 없는 남편이었다고. 그럼 엄마가 엄마로 돌아올 줄 알았어.
그런 엄마가 더 이상 아빠의 음식도 입에 대기 싫어하는 순간이 많아지는 걸 보았을 때 비로소 엄마는 이 생을 정리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무너졌어. 어쩌면 엄마는 치매 뒤에 숨고 싶었는지도 몰라. 평생을 종처럼 윽박지르며 구박한 남편과 가슴에 묻은 먼저 간 딸을 지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몰라. 점점 더 자주 엄마의 몸이 주사 바늘을 거부했어. 마치 '이제 다 준비했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처럼.
그 답답하고 슬픈 요양병원을 집 삼아 살면서도 엄마는 엄마를 돌봐주시는 간병인들과 엄마보다 조금도 나을 바 없는 다섯 명의 병실 친구들의 마음을 살폈었지. 환자복에 실수를 하는 날이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보다 그것을 닦아주는 간병인의 마음을 헤아리고는 힘없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억지로 웃으며 간병인과 눈을 마주치곤 했어. 미안해, 엄마가 요양병원 로비에서 지나가는 버스를 볼 때마다 "집에 가자, 집에 가야지" 했었는데 그렇게 못해줘서. 내 알량한 직업과 젖 못 뗀 강아지 같은 내 새끼들을 두고 엄마를 돌볼 수 없어서 모른 척했었다는 걸 엄마는 알고 있었지.
엄마는 집에 가는 버스를 못 타고, 엄마의 장례식장으로 가는 봉고를 탔어. 엄마, 터널을 지나 언니네 집 앞을 지나가면서 엄마 옆에 앉아 엄마한테 했던 말들 기억나? 들었어? 엄마가 들었을 것 같았어. 누군가 그러더라 귀가 제일 늦게 떠난다고. 이승의 소리 더 듣고 싶은 귀가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다고. 그래서 엄마한테 계속 말하고 싶었어.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엄마 집으로 모시고 싶었어. 엄마랑. 엄마가 애써 키운 무화과나무와 석류나무에서 과일을 따다가 실컷 먹고 싶었어.
내가 만약 엄마처럼 누워서 봉고를 타고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었다면 어땠을까? 난 내가 이 세상에서 젤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에서 손을 잡아주길 바랐을 거야. 엄마, 너무 서운해하지 마. 엄마 옆에 앉아서 엄마의 마지막 드라이브를 함께 했던 사람이 아빠가 아니라 나라서. 봉고를 타고 싶지 않아 하시던 아빠의 모습은 안 보았길 바라. 요양병원까지 오지 않고 집에서 가까운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고 싶어 하던 언니는 용서해. 이승을 떠나는 마음에 서운한 것들은 두지 않았으면 해. 그건 내가 가슴에 담았거든. 엄마는 홀가분하게 떠나면 되는 거야.
엄마, 난 그래서 결심했어. 내가 마지막 드라이브 갈 때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을 미리 정해 두기로. 내가 차갑게 식어가서 곁에 있기 무섭더라도, 혹은 이제 장례식을 잘 치러내야 하니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지 생각해서 냉정해져야 했더라도, 난 그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내 인생 통틀어 온 정성을 다해 살았을 테니까. 아마도 나는 이 생의 마지막 드라이브를 하며 내 옆에서 조용히 노래를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