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 가기 전 아직도 추운 날씨에 목련은 생명이 없어 보이는 나뭇가지에서 꽃눈을 만들어 낸다. 부드러운 솜털이 덮인 봉오리가 봉긋 올라오면 봄이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반가운 존재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정원에는 25층 높은 건물에 가려 햇빛을 잘 못 보는 목련 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볕 잘 드는 학교 정원에 서 있던 목련이 다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하나둘 시들어갈 때쯤에서야 이 나무에서는 꽃봉오리가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고도 몇 주가 지나서야 꽃이 피어났는데, 웬일인지 저 끄트머리 한 군데에서만 꽃이 피어났다.
이 사진을 몇몇한테 보여줬더니 포토샵으로 다른 꽃을 다 지웠냐고 물어보곤 했다. 잘 보면 알겠지만, 가지 끝마다 아직도 영글지 않은 꽃눈이 다 있다.
수백 개의 꽃눈 중에서 왜 이 한송이만 일찍 피어났을까?
꼭대기에 있어서 빛을 많이 바라본 것인지? 아니면 차가운 겨울바람에 더 많이 시달려 먼저 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한 송이의 꽃이 이 나무가 목련 나무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이파리도 하나 없는 겨울을 막 지낸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쉽게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일찍 피어난 이 한송이의 존재로 인해 나무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한송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참 장하다는 생각만 든다.
지난번 글에서 목련화는 북향화라는 소개를 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bovie/71)
아이보리의 순수함을 간직한 고운 꽃잎도 좋지만, 내게는 북쪽을 향해 핀다는 이 꽃 이름이 더 의미심장하다. 북쪽은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나의 이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한송이 목련꽃의 헌신으로 나무 전제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 것처럼 개척자 이 한송이 꽃의 의미는 더 남다르다.
나를 보면 내가 소속한 단체나 공동체를 사람들이 어떠어떠하다고 인식하게 된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당신을 보니 당신이 속한 단체(가정)가 어떨지 알만하겠소!'
이 한송이 꽃을 보고 가지마다 가득 피어날 아름다운 꽃을 상상하듯이, 나 한 사람의 모습과 존재가 내가 속한 유기적 공동체의 됨됨이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쓸쓸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홀로 피어난 것은 이 거대한 공동체의 선구자의 역할을 하러 온 것이다.
혼자만 다 뒤집어쓰고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와 함께한 모두를 위해 귀한 일을 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내가 잘하면 덩달아 우리 모두가 칭찬을 받는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