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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비 Mar 21. 2016

소통 단절의 결정체, 단풍잎

어느 주말 오후에 지하철 4호선 선바위역 근처에 강의가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고 또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시간을 넉넉히 잡고 일찍 출발하였더니 무려 1시간이나 일찍 도착을 했다. 

나를 초대해주신 선생님은 시간이 다 되어야 오신다고 하셔서 혼자 강의장에 있기가 불편할 것 같아서 주변을 산책하다가 들어가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주변 지도를 살펴보니 바로 앞에 우면산 자락이 있었다. 늦가을의 정취에 걸맞게 길바닥은 온갖 낙엽이 수북하였다.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구두를 신고 나왔지만 이런 길을 가면서 어찌 더러워질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바삭거리는 나뭇잎들을 툭툭 차면서 걷는 기분은 마치 바닷가의 파도가 나의 발을 간질이는 그런 느낌이었다. 

도로를 벗어나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며칠 전 비가 온 탓인지 땅이 질퍽해진 곳이 많아 걷기가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잠시나마 도시를 벗어나 산속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가를 생각하며 자연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가을 산의 아름다운 정취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볼품이 없었다. 칙칙한 나무색과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체념한 체 지나가다가 판매를 위해 묘목을 심어 놓은 곳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 향나무 묘목이었는데 그 가운데 우뚝 선 한그루 단풍나무가 있었다. 단연코 그 색의 아름다움이 돋보였고 질퍽한 땅을 가로질러 그 나무를 만났다. 

이 나뭇잎들은 몇 달 전만 해도 초록빛이었을 텐데 이제는 노랗고 붉은색으로 물들여져 있다. 왜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드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나무가 살아남기 위한 극단의 조치라 할 수 있다. 겨울이 가까워져 일조량이 줄고 기온이 떨어지게 되면 나무는 월동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나뭇잎과 나뭇가지 사이에 떨켜층이 생기기 시작하고 이것이 둘 사이의 교통을 방해한다. 뿌리에서 흡수된 물이 나뭇잎으로 공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잎에서 광합성 작용으로 만들어진 양분도 나무에 공급되지 못하게 된다. 물이 부족하고 양분이 자꾸 싸이면서 이파리의 산성도가 높아지게 되고 엽록소의 합성이 멈추게 된다. 이 엽록소는 햇빛에 분해되어 사라지게 되며 이파리에서 서서히 녹색이 사라지게 된다. 안토시아닌, 카로틴, 크산토필, 타닌 같은 색소들은 상대적으로 더디게 파괴되기 때문에 잎의 색이 노랗고 빨갛게 변하는 것이다. 이 색소들 마저 사라지면 나뭇잎은 갈색을 띠게 된다. 

아름답게 물든 단풍잎은 나무가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인 것이다.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제일 먼저 취하는 행동은 나뭇잎과의 소통을 단절하는 것이다. 서로 오고 가지 않기 때문에 나뭇잎은 죽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취해진다. 내가 아무리 좋은 영양분을 많이 만들어내도 이것이 나무로 흘러가지 않으면 나는 파멸하고 만다. 나눌수록 풍성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힘닿는 대로 내 것을 나누어 이웃을 섬기는 일이 많을수록 더 건강한 나무가 되는 법이다. 가끔 뉴스에 수십억 원의 많은 돈을 소유하고서도 비참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드릴 감사는 '일용할 양식'에 있는 것이지 '차고 넘쳐 주체하기 어려운 창고'에 있지 않다.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쓰기 위해 있는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도 써야 우리 삶이 더 윤택해진다. 가을에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단풍잎을 보면 이제는 소통을 먼저 떠올릴 것 같다. 

단풍잎이 아름답게 보이는 색들은 엽록소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푸른 잎 속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색이지만 다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죽을 때가 돼서야 보이는 형형색색의 이 아름다움을 만끽해보자. 단풍의 색을 보여주기 위해 나무에서 떨어져야만 한다면 녹색이 가득한 이파리를 더 아름답게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푸르고 싱싱할 때 더 많이 사랑하고 나누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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