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Jul 02. 2023

갑자기 아빠 생각

언제나 감사한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였을 때인 것 같다.

조금씩 모은 용돈을 가지고 동네 서점에 가서  

고심 끝에 내 돈으로 샀던 첫 번째 책은 '얄숙이 만화일기'라는 만화책이었다.


신나서 집으로 달려갔고, 처음으로 산 책을 엄마에게 자랑했다.

내가 사 왔던 '얄숙이 만화일기'를 본 엄마는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정말 신기하네"


'얄숙이 만화일기'는 만화책을 좋아했던 아빠가 이미 가지고 있던 책이었는데

운명적으로(?) 하필 내가 골라왔던 책도 '얄숙이 만화일기'였던 것이다.

엄마의 얘기를 듣고 나는 내심 기쁜 마음이었다. 

아빠를 좋아했던 만큼 아빠와의 공통점을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은 적도 없고, 알지 못했는데도 이렇게 같은 만화책을 고를 수 있다니. 좋다!'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고 좀 더 크고 나서도 아빠와 손을 잡고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나는 아빠의 가운데 손가락만 잡는 걸 좋아했다. 손발이 다 차가운 나와는 달리 뜨끈한 난로 같은 아빠 손이 좋았고,  특히나 가운데 손가락은 손가락 중에서 가장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날도 역시나 아빠의 가운데 손가락을 잡고 길을 걷는데 문득 아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이는 어릴 때도 꼭 아빠 가운데 손가락만 잡고 다녔는데."

습관처럼 가운데 손가락을 잡고 거리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참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했다.


아빠는 손재주가 참 좋으셔서 깔끔하고 세세하게 뭔가 만드는 걸 잘하셨는데 

한 번은 교과서가 물에 젖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책을 직접 복사하셔서 실제 교과서와 똑같은 형태로 책을 만들어주셨다. 

친구들이 너희 아빠 책을 되게 잘 만들었다고 해주던 얘기에 절로 어깨가 으쓱했다.  


아빠와 단둘이 찍은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어린 시절 사진 중 하나다.

계단 위칸에는 아빠가 앉고 아래칸에 나는 아빠에게 안긴 채 있다. 

이 사진의 전체적인 느낌을 좋아했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꽤나 앙증맞고 그런 나를 안고 있는 아빠는 젊고 날렵하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아빠가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걸 사진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책상 유리 아래 끼워두고 자주 들여다보곤 했는데 

집이 이사를 하면서 유리를 옮기다 보니 오래된 사진이 유리에 들러붙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여러 개로 조각난 사진이라도 맞춰보겠다고 붙여뒀지만 제대로 모양이 갖춰지진 않았다. 


그 사진 속의 아빠는 정말 젊었는데 사실 생각해 보면 아빠는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자마자 거의 내가 생겼으니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첫 째 딸이 생긴 셈이다.  지금 내 수준을 생각해 보면 이런 내가 누군가를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지만 

아빠는 그 삶을 지난 몇십 년 동안 든든하고 묵묵하게 살아오셨다. 


복이 많아서 학자금 대출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필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다. 내가 지금 뭘 하든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볼 수 있었던 건 아빠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기 때문임을 안다. 지금도 많은 신세를 지고 있지만 내리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게 아무런 바라는 바가 없으시다. 

돌이켜보면 정말 감사하게도 한 번도 나에게 '네가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뉘앙스의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인생의 선택의 순간들이 있을 때 내 선택에 대해 늘 존중해 주셨다. 

이게 정말 아빠에게 가장 감사한 부분이다. 

내 인생은 내 인생대로 살 수 있도록 나에게 아무런 요구가 없으신 점. 

예전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나도 한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며 더 깨닫고 있는 중이다. 

사춘기를 겪고 부모님이 투닥투닥 하실 때의 시선으로 아빠를 바라볼 때

내 마음에 뭔가 들지 않아서 투덜거리고 징징거릴 때, 아빠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 

혼자 서러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낸 적도 있었지만 

그때를 돌아보면 내가 참 많이 어렸다.


경상도 감성을 베이스로 둔 부녀지간이라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살가운 느낌은 없어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사드린 선글라스도 마음에 드셨는지 착용 인증샷을 보내주셨다. 

떠올리면 기분 좋고, 편안하고, 든든하고 마음 찡한.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시며 곁에 계시면 좋겠다고, 나는 오늘도 바라는 마음을 낸다.

언제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단팥빵을 좋아하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좋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