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제목이 아니라 작가를 보고 집었던 책.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채 왜 하필 작별이라는 지. 왜 하필 제주에선지. 이렇게 불쑥 들어올 일이면 지하철에서 읽지 말았어야 하는데. 작별하지 않는다. 무엇이?
제주에서 함박눈 한번 쏟아지기를 기다려 본 적 있는지. 나도 눈 보고 싶어 눈 쌓인 거 보고 싶어 노래를 불렀다. 누구 말마따나 눈 오면 종달리서 용눈이오름까지 걸어가겠다고. 그 일까진 않터라도 올해 겨울에 신명 나게 사진을 찍었더랬지. 용눈이로 백약이로 동검은이로 눈에 발을 푹푹 빠뜨리고 적시며. 그래 이거야 신난 개처럼 나돌았지. 중산간이 눈으로 죄 덮인 풍경에, 딱 한 장면씩 아주 가끔 떠올랐어. 하얗게 쌓인 저 오름 너머로 붉은 피를 뚝뚝 흘리고 걸어갔대. 어느 어린 임신부가. 그랬대.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채 뱉고 머리에선 지웠어. 그냥 그랬대. 오래전에 어디선가 읽었어. 그랬대.
작별하지 않는다. 무엇이. 작가는 이것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 이길 바란다고. 선명하게 그려내고 손에 꽉 쥘 용기가 있는지. 이것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고 느낄 때 지하철에서 조금씩 소름이 돋았어. 반가움에. 이것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면, 작별은 원래 없었겠구나. 한 문장 '관측하려는 찰나 한 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피부 맞닿는 일이야 겨우 관측에 불과했을까. 톡 하고 없어질 바에 멀리서 바람으로 그림자로 느낄까.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 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 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여전히 확신은 없겠으나 느낄 뿐이다. 여전히 용기는 없겠으나 배울 뿐이고. 선명히 그려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아직 사라지지 마'라고, '기어이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라고 말하기를. 의심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원래 작별은 없었다고. '작은 새 날개 퍼덕'일 뿐이었다고.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 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