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대치동 대신 파리나 갈까?
한 번쯤 현지인처럼, 파리지앵처럼 하루를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휴일 아침 늦잠을 자고, 동네 산책을 하는 우리 일상과 같은 하루를 보내기로 합니다. 어제 스트라스부르 여행 탓이기고 한지 일요일 아침 좀처럼 침대 밖으로 나가기가 싫습니다. 해가 어디에 걸려있는지도 모르게 늦잠을 자고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 거립니다. 음악을 듣고, 뉴스를 검색하기를 한참, 커피를 마시려 겨우 침대밖 세상으로 빠져나옵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을 것이 거의 다 떨어져 갑니다. 장을 봐 놔야겠습니다. 목요일과 일요일에만 열리는 바스티유 재래시장을 가기 위해 지하철 M1을 기다립니다. 기다리기를 한참, 파업의 여파인지 M1이 운행을 멈췄다고 합니다. 파리에 살려면 파업과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큰 불평 없이 역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에게 파업은 자연스러운 일상입니다.
76번 버스를 타고 시장에 도착합니다.
혁명탑 아래로 노천 시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시장이 선 이곳 광장은 과거 바스티유 감옥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프랑스 시민들이 루이 16세와 귀족, 성직자의 지배에 항거하고 권위에 저항하며 이곳 바스티유의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더없이 제격입니다.
우리 재래시장이 그렇듯 이곳 바스티유 시장에도 없는 것 빼고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시장 입구에 좌판에서는 카펫, 쿠션, 주방도구와 청소도구들을 팝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야채, 생선, 치즈, 와인, 빵, 정육점, 꽃, 올리브, 과일 가게 등이 즐비합니다. 상인들은 시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시식을 권하며 사람을 끌어들입니다. 이곳저곳 주인과 손님이 흥정을 하며 원하는 물건을 사고 팝니다.
유모차를 끌고 온 부부나 커다란 강아지와 함께 장을 보러 온 청년, 동네 터줏대감 같은 노인과 인사하는 야채가게 아저씨, 자신이 파는 바게트에 자부심 가득한 빵가게 아줌마, 신선한 산딸기와 줄기 토마토를 파는 곱슬머리 총각, 수백 가지 맛의 치즈는 파는 선량한 소녀와 자신의 부르고뉴 피노누아가 맛있다며 수줍은 많은 와인가게 할아버지까지 사람 사는 시장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일주일의 먹거리는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자니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텅 빈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야채와 치즈, 산딸기, 뵈프 부르기뇽, 훈제 통닭, 2병의 부르고뉴 와인과 바게트를 장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향합니다. 오늘 바스티유 시장에서 나름 플렉스 한 과소비를 좀 합니다. 장바구니만큼이나 마음도 채워집니다.
장 봐온 음식을 먹고 낮잠 자는 짝꿍과 중3 딸을 남겨놓고 산책을 나갑니다.
센강을 따라 걷습니다. 파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모델이 되어주는 도시입니다. 파리지앵이 아니더라도 파리를 찾은 관광객들은 저마다 누군가의 사진 속에 파리를 구성하는 원자가 되어 추억으로 자기 잡게 됩니다. 나도 그들을 찍고 그들도 나를 찍으며 기억을 남기고 그 기억은 추억이 됩니다.
센강의 또 다른 매력은 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부키니스트들입니다. 따로 오픈하는 시간이 정해 진 것도 아닙니다. 부키니스트들은 그들이 열고 싶은 시간에 노점을 열고 제각각의 오래된 책과 그림, 기념품을 팝니다.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유영하 듯 산책하며 구경을 합니다.
플라뇌르 Flâneur
주변을 배회하고 어슬렁거리며 관찰하고 돌아다니는 도시의 산책자입니다.
오늘 나는 플라뇌르가 되어 도시를 산책합니다. 센강을 걷고 부키니스트를 만납니다. 프랑수아 사강의 책을 한 권 샀습니다. 불어는 모르지만 오늘 이 시간을 추억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물건이라 생각합니다.
일요일이 슬슬 채워져 갑니다.
P.S.
오늘부터 파리 날씨가 좀 풀렸습니다. 걷기 좋은 날씨인데... 또 내일부터는 비가 온다 하네요... 역시 파리의 겨울입니다.
2024년 1월 22일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파리에서 BOX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