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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un 08. 2016

한강 라이딩



작년, 2015년 10월 24일


토요일 오전 한강 라이딩


너무 방심하고 나왔나. 나에겐 동네  바퀴지만 이곳은 전국의 일류 라이더들이 중무장하여 찾는다는 최대의 라이더 패션 격전지가 아니던가.


지나쳐간  백 명의 라이더 중 단언컨대 내 패션이 최악이다.


펑퍼짐한 잠바, 동네 백수 짝퉁 나이키 츄리닝 바지, 크록스 운동화, 화룡점정으로 고시생 뿔테 안경까지. 유일한 라이벌은 쌀집 자전거에 롯데 자이언츠 모자, 스키복 바지를 입고 큰 볼륨으로 뽕짝을 틀고 지나가던 할아버지 정도...


그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빛의 속도로 달리자! 그렇게 난 평소 쉬어가는 인산인해 벤치들을 다 건너뛰고, 보다 더 먼 곳까지 달리게 되었고,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고 잠시 똬리를 트고 큰 대자로 누워본다.



가을이다. 좋구나.


난 잠시 지나가는 라이더들을 구경한다. 와우, 역시 화려하다. 길가의 만개한 코스모스들은 이들의 화려함에 조연으로 전락해버린다. 그중 유독 돋보이는 한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남녀 반반 30명 규모가 영국 버킹검 궁전 근위대병들처럼 웅장하고 멋있게 다가온다.


속으로 물개 박수를 치고 있는데... 어... 어...


그들의 리더가 원두막을 보더니 숙도를 늦춘다. 아뿔싸, 여긴 포토존이었구나. 30명의 유아인 아이유 무리들이 원두막을 둘러싸고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도망가려던 내게 사진을 부탁한다.


난 서둘러 헬멧을 찾았으나 저기 자전거에 걸어놨구나. 아, 심지어 머리까지 개떡졌다.

난 무려 5개의 풍경으로 20여 장의 사진을 찍어줬고, 30명의 슈퍼스타들의 시선이 내게 장시간 초집중되는 굴욕을 맛보았다.


마지막 샷을 앞두고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았는데, 그들의 60개 눈동자는 똑똑히 보았다. 잠바 입고 백수 츄리닝 입고 크록스를 신고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 떡진 사람이 무려 ""폴더폰""으로 전화를 받는 모습을. 심지어 농도 짙은 부산 사투리로.


난 서로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눈동자들을 분명히 보았다. 그들의 단톡 방에서 회자될 오늘 아침의 풍경.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지난 주말, 2016년 6월 6일.


늦잠 자고 깬 지 몇 시간 안되었는데, 또다시 잠이 왔다. 나 자신이 벌레같았다. 잠도 깰 겸 애들 데리고 놀이터나 갈까 했는데, 애들은 옆 동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한다. 두어 시간의 자유시간. 산책이나 갈까 하다가, 자전거가 눈에 밟혔다.


그래, 한강이나 가자.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후 약 7개월 만의 라이딩이다.


그동안 슈퍼마켓이나 문방구 심부름을 갈 때 가끔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한강 라이딩은 복장과 마음가짐부터 달라야 한다. 그렇다고 오래간만의 설렘, 피부에 와 닿는 강바람의 시원함, 계절마다 바뀌는 꽃내음, 끝없이 펼쳐진 한강과 서울 빌딩들을 바라보며 느껴보는 호연지기, 유산소 운동으로 인한 심폐기능 발달 등등을 위함은 아니었다. 왠지 오늘 안 타 주면 자전거에 녹이 슬 것 같았다. 녹 벗기는데 2만원이다.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향할 그곳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뒤에 태우고 휘파람 불면서 지그재그로 가거나, 아가씨가 시장바구니에 강아지를 태우고 느릿느릿 페달을 밟고 나아가는 시골길이 아니다. 찌르릉찌르릉 소리의 벨을 달고 신문 배달할 때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낄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브랜드와 아이템들로 무장한 라이팅 패션 경연장이자 팀 추월 레이스 현장이다.


지난번엔 라이딩 웨어에서 큰 좌절감을 맛본 터라, 이번에는 복장에 신경을 썼다. 지난번에 샛노란 자전거 져지만 입었더니, 커다란 바나나가 다가오는 줄 알았던지 엄청나게 벌레들이 꼬였다. 라이딩 후 옷에 덕지덕지 붙은 벌레를 털어내었던 더러운 기억으로 7개월간 한강을 멀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덥긴 했지만 노란 져지 위로 벌레들이 무서워할만한 티를 하나 더 겹쳐 입었다. 캡틴 아메리카 방패 티셔츠. 난 개인적으로는 토르의 망치를 더 좋아하나, 하와이 Target에는 캡틴 아메리카 방패 옷만 팔았다. 그때 Target에서 함께 샀던 Texas 모자도 썼다.




출발하기 전 먹을 것도 챙기고 음악도 세팅했다. 지가 가봤자 얼마나 갈 거라고 별 걸 다 챙긴다. 그래도 이건 마음가짐이다. 동네 한 바퀴를 돌더라도 올림픽에 나가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난 올림픽 레벨은 아니구나. 음악 선곡하기 귀챦아서 지니차트 1~20위 듣기를 선택한 후 첫 페달을 밟았다. 국토 종단도 한 페달 질부터 시작이다.


의욕적으로 속도를 높이며 치고 나왔지만, 마주 달리는 몇 팀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헬멧을 안 썼구나. 기어를 낮은 단수로 급히 옮기며 속도를 줄였다. 두부처럼 물컹물컹한 뇌를 보호하기 위하여 안전속도로 달리기로 했다.


첫 번째 음악으로 트와이스의 Cheer UP. 이 노래가 이번 주 1위 곡이다. 걸그룹이 샤샤샤 거리며 '조르지마, 어디 가지 않아. 되어줄게, 너의 Baby'라고 불러주니 절로 Cheer Up이 된다. 내가 점점 그 유명한 아재가 되어가는구나. 하지만 슬픈 발라드가 나오면 페달질이 덧없어진다. 어차피 돌아갈 길,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힘이 빠진다. 그래서 자전거를 세웠다.


기왕 나온 거, 내 몸의 에너지를 최고치로 끌어올릴 음악이 필요하다.


한 그룹이 떠올랐다.

몇 년 만에 이들을 만나는가. 폴더폰을 꾹꾹 누르는 손끝이 떨려온다.


London Boys.



중학교 때, 롤러스케이트장에서 화려한 사이드 스텝, 백스텝을 밟으며 듣던 음악들, 라이딩에 제격이다. 특히 Harlem Desire, London Nights, Dance Dance Dance가 나올 땐 내 몸의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헬멧을 안 쓰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괴성을 지르며 몇 무리의 꿀벅지 동호인들을 추월해서 앞으로 치고 나가기도 했다. 비트에서 정우성이 두 팔을 벌려 오토바이를 타던 기분이 느껴졌다. 정우성이랑 나랑 다른게 뭐가 있는가.


중간에 자전거를 잠시 세우고 유튜브에서 London Boys의 뮤직비디오를 찾아봤다. 서태지, 듀스, 터보의 음악처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곡들이 있다. 하지만 London Boys의 뮤직비디오는 멜로디, 가사, 패션, 춤 등 모든 면이 다 엄청나게 촌스럽다. 복고의 끝판왕들이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aofSEVUbA80


https://www.youtube.com/watch?v=zI9UR-5R40M



음악에 너무 빠져 있었던 걸까. 분명 출발할 땐 날씨가 화창했는데 주위가 많이 어두워졌다. 폴더폰 조그만 창으로 뮤직비디오를 봤더니 눈이 침침해 진건가. 왜 이렇게 주변이 우중충하지? 내 나이 벌써 40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내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면 안구건조증은 아닌 듯하고, 피곤하면 순간적으로 시력 저하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럴 땐 결명자차를 마시거나 눈 마사지를 해주라는 네이버 고수님의 지식인 가르침이 떠올랐다.


그래서 눈 마사지를 위하여 손바닥을 눈으로 가져갔더니, 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구나. 어쩐지 뮤직비디오가 너무 어둡더라. 선글라스를 벗으니 다시 화창한 날씨 Again이다.


한 10km를 달렸나. 거친 바람을 뚫고 국토를 종주한 듯한 허기가 몰려온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 치맥이 아닌 치콜이 떠올랐지만, 간식거리는 준비해왔으니 우선 그늘부터 찾자.


한강 다리 밑이나 그늘을 피할 수 있는 곳에는 인파가 넘친다.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뜨거운 벤치들도 이미 꽉 찼다. 그러다가 외로운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벤치에만 사람이 없었다. 나의 점심은 저곳이다. 난 부드럽게 파킹을 하고 자전거를 나무에 기대 세워놓은 후 벤치로 갔더니,


아, 이미 이 곳은 터줏대감이 있었구나.

거미 한 마리가 지 몸에 비해서 과도하게 큰 거미줄을 벤치에 돌돌 감아놨다.


아기 돼지 삼 형제가 떠올랐다. 첫째 돼지는 짚으로 집을 지어 늑대가 바람을 불면 날아가버렸고, 둘째 돼지는 나무로 집을 지어 늑대가 돌진하자 산산조각 났으며, 벽돌집을 지은 셋째 돼지만 안전하여 게으른 형들 돼지들을 다 받아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훈훈한 스토리. 이 거미는 부지런한 셋째 거미였으리라. 그래서 난 나쁜 늑대 역할은 하지 않기로 했다. 가위손이 되어 기술적으로 거미줄을 커트하여 내가 앉을 정도의 자리만 확보하였다. 내가 떠난 후 세 번 정도만 왔다 갔다 하면 다시 원복 시킬 수 있을 정도만 거미줄을 파손한 채 그 공간을 사이좋게 쉐어했다.


그리고 집에서 챙겨간 씹을 거리들을 꺼냈다. 닥터유, 시리얼바, 트윅스, 몬스타 에너지 음료 등의 조합이 나왔으면 뭔가 쿨했을 것 같지만, 내 가방에서 나온 음식은 와플 빵, 오예스 4개들이 한 박스, 포카리스웨트였다.




오예스는 캡틴 아메리카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 모양 빠지게 먹지 않았다.

그리고 허세 쩔게 한강을 지긋이 바라보며 London Boys 음악들을 한 바퀴 더 들었다.


이번 주는 이쯤에서 돌아가자.

다음 주에는 헬멧까지 쓰고 음식 더 간지 나게 챙겨서, 더 멀리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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