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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un 01. 2016

벌레 전쟁

내 생일이 겨울이라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겨울을 좋아했다. 대학생 때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빨래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일주일간 꿉꿉한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다녀야 했고, 양복쟁이 직장인이 된 이후로는 조금만 강행군을 하면 찾아오는 와이셔츠 밑 겨땀과 후끈함 때문에 여름철을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큰 문제는 아니다. 내가 여름철에 참을 수 없는 건 날아다니는 종자들.


우선 모기. 내 피를 빨아먹는 것쯤이야 참을 수 있다. 난 원래 나눠주고 퍼주는걸 좋아한다. 게다가 내 몸에 5리터 정도의 피가 있는데 모기 여러 마리가 빨대를 꼽고 빨아봤자 간지러운 수준 아니겠는가. 게다가 피를 빠는 모기는 알을 만드는데 필요한 양분 섭취를 목적으로 하는 암모기들이라고 하는데, 나도 애 키우는 입장에서 알 낳기 위한 행동이라면 기꺼이 나눠줄 수 있다.


다만, 내 귀에서 왱왱거리면 죽여버린다. 암모기 건 숫모기 건 큰 놈이건 작은놈이건 자비란 없다. 왱왱거리는 소리가 나의 달팽이관에 전달되는 순간, 숨겨져 있던 나의 폭력성이 폭발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비장한 얼굴로 창문과 방문을 모두 닫고 퇴로를 차단한 다음, 날 깨운 녀석을 처단한다.


그래도 모기는 무게감이 있어서 잽이나 스트레이트를 몇 방을 날리면 한 번은 주먹 끝에 부딪치는 느낌이 나며 방바닥에서 기절한 상태로 잡힌다. 묘한 짜릿함이 몰려온다.


그런데 모기보다 날 더 성가시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날파리. 이 녀석은 너무 가벼워 잽을 날려도, 허공을 가르는 주먹의 바람에 먼저 날아가버려 죽이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서로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금세 알을 까고 수십 마리로 불어난다. 


지난 주말도 그랬다. 


평화롭게 NBA 플레이오프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날파리 두 마리가 내 시야를 방해했다. 스테판 커리가 날린 회심의 3점 슛이 아름다운 곡선으로 림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순간에, 날파리 두 마리가 나의 집중력을 방해했다. 오케이, 여기까지. 내가 봐줄 수 있는 선을 넘었다. 용서할 수 없다.


부엌과 떨어진 내 방에서 복수의 날파리가 발견되었다는 말은 부엌은 이미 이들에게 점령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엌으로 갔더니 검은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바나나 한 송이가 놓여 있고, 그 주위에서 날파리들이 파티를 하고 있다. 난 이들에게 문을 열어준 적이 없는데, 내 집에서 놀고 있다. 좌시할 수 없다. 


문제의 버네이너(banana)


그래서 이들을 처단하기로 했다. 소탕 작전을 위해 검색부터 시작했다. 바나나 주위에서 날아다니는 날파리, 정확한 이름은 초파리였다. 영어로는 small fruit fly. 생긴 거에 비해 지나치게 예쁜 영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바나나, 파인애플, 수박 등 달달한 과일들이고, 상하면 상할수록 더 좋아하는 변태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간장, 식초와 같이 강한 냄새에 끌린다고 한다. 이들 소탕을 위한 지구촌 곳곳의 노력들이 소개되어 있다. 


오케이. 작전 구상 완료.


일단 이들을 유인할 죽음의 트랩을 설치한다. 인터넷에서는 종이컵이나 커피 테이크아웃 잔으로 만든 트랩들이 많이 보이던데, 난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로 했다. 비록 10여 일에 불과한 수명이겠지만 유명을 달리할 장소는 남부럽지 않게 마련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Villeroy & Roch 그릇을 꺼냈다. 


물 건너 온 Villeroy & Boch


와이프가 독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때, 장모님이 딸들 나중에 시집가면 줄 거라고 Villeroy & Boch 그릇 세트를 사셨다는데, 창고에서 십여 년을 박스에 갇혀 있다가 진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그릇 중 하나였다. 이 정도의 스토리를 가진  명품 그릇에서 생의 마감이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죽음일 것이다. 


접시에 진간장과 식초를 3:1 비율로 섞었다. 수박 한 덩어리도 넣어줄까 하다가 수박 깎기가 귀찮아서 패스. 그리고 랩을 싸고 구멍을 뚫었다.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는 마법의 구멍들.


간장, 식초 그리고 구멍을 위한 도구


조촐하게 구멍 세 개로 시작


그렇게 바나나 위에 살포시 그릇을 올려두었다. 구멍 사이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냄새가, 어린 시절 포장마차에서 정신줄 놓고 오뎅을 먹을 때 찍어먹던 그 간장 냄새였다. 나도 빠져버리고 싶은데 하물며 날파리들은 어떨까. 영혼을 팔아서라도 뛰어들고 싶을 듯했다.



그렇게 트랩을 설치하고 30분 후에 돌아오니, 10여 마리가 빠져있다. 마치 칡차에 국화잎을 띄워놓은 듯한 아름다운 모습이다.


현재 스코어 익사 넷, 수영중 여덟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다시 오니, 30여 마리가 빠져있다. 절반은 익사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애 마지막 수영을 하고 있다. 미안함이 밀려온다. 수박 한 덩어리라도 넣어줄걸 그랬다. 



잘 가라. Small fruit fly들아. 

다시는 우리 집 찾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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