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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Mar 05. 2017

월간 김창우 : 영화리뷰 31~50

2017년 영화 몰아보기 두 번째 이야기들.

많은 작품들을 다루다 보니 최대한 스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조금씩 스포가 흘러나오는 부분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범인은 김창우였다!" 따위의 막장 스포는 없음.


나름 바쁜 시간 쪼개서 1일 1 영화를 보고 있어서 전문가 추천, 지인 추천, 네이버 평점 확인 등을 통해 재미있거나 의미 있을 영화만 골라서 보는 편이니,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평점은 무시해도 됨. 적어도 3.0 이상이면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가 될 수 있을 듯.  






31.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The Place Beyond the Pines, 2013)

(★★★★★ 5.0)

The Place beyond the Pines.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눈을 사고 싶다. 그 눈으로 내용을 모른 체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나의 첫 5.0 평점 영화. 라이언 고슬링은 영화 고르는 능력 또한 탁월한 것 같다. 이 영화를 더 칭찬하기 위해선 스포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적어도 이 영화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꼭 봤으면 하는 마음에 그저 "!" 느낌표 하나만으로 영화평을 대신한다. 특히 시놉시스를 모른 채 보길 추천한다.


런 작품을 만나기 위해, 밤마다 그렇게 영화를 봤나 보다.



32. 영웅본색 (A better tomorrow, 1986)

(★★★ 3.0)

영웅본색 1, 2, 3 중 1986년에 개봉한 첫 번째 편. 영문 제목이 'A Better Tomorrow'였네. 30년 전에 봤지만, '구니스'를 다시 볼 때처럼 마치 3년 전에 본 영화처럼 친근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영웅본색'하면 떠올리던 장면들은 모'영웅본색 2'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웅본색 2'의 프리퀄 같은 느낌의 1편은 처음 보는 영화처럼 스토리 및 캐릭터들이 생소했다.


1편에서 유일하게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30년째 남자들 가오의 끝판왕인 지폐에 불을 붙여서 담배를 피우는 그 유명한 씬이었는데, 그 마저도 태운 것이 위조지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긴 주윤발이 그 정도로 돈을 함부로 다루던 영화는, 카드만 잡으면 스티플이나 로티플을 띄우던 '도신'시리즈였지.


영웅본색 하면 주제곡을 빠뜨릴 수 없다. 장국영이 직접 부른 당년정(年情). "헤잉~ 헹 쑌 쎄잉~ 쬬와 완워 쏭 완뉘~"하며 많이도 따라 불렀던 곡이다. 오랜만에 들어서 좋았던지 나의 고막들도 옛 추억에 잠겨 파르르 떨렸으나, 문제는 너무 많이 흘러나왔다. 당년정 한 곡으로 영화 전체를 우려먹었다. 마치 "이 장면에선 관객들 슬퍼해야 함. 레디, 액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분위기 잡아야 하는 장면이 있으면 어김없이 "헤이~ 헹 쑌 세잉~ 쪼와 완워 쏭완뉘~"가 흘러나왔다. 홀리쉣! 이제 그만! 그나마 한 곡만 계속 우려내기가 미안했던지, 악기를 바꿔가며 다양한 버전으로 흘러나오긴 했다.


주말 드라마를 보다가, 어린이 프로에서 번개맨의 과장 연기를 보면 나름 신선하듯이, 장국영의 젊은 시절 오버 연기도 귀여웠다.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엑스트라들은 총에 맞으면 그 자리에서 힘차게 뒤로 점프해서 공중 삼회전을 돈 후 쓰러져 죽는다. 그들 눈엔 총 맞으면 픽하고 쓰러지는 요즘 엑스트라들이 한심해 보일 듯하다. "우리 땐 말이야~"


하긴 그 시절엔 헐리우드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록키 4'에서 스탤론 형님은 짧은 레프트 잽을 한 대 맞아도, 토르의 망치로 얼굴을 강타당한 것처럼 고개가 180도 뒤로 젖혀지며 휘청거렸었지. 그 와중에 우리 윤발이 형님은 오버하는 것조차 멋있을 만큼 연기력과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어린 시절 영웅들, 다시 만나 좋았다.



33. 스내치 (Snatch, 2000)

(★★★ 3.5)

가이리치는 마돈나와 결혼하기 전 상당히 창의적이고 총명한 감독이었다. 엄청난 구성, 빠른 전개, 특이한 캐릭터들의 향연. 그중에서도 브래드 피트는 정말 연기의 신이다. '세븐'과 '12 몽키스'를 보면서, 그 이상의 연기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브래드 형은 이 영화에서 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또 한 번의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브래드 형의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집시 사투리 연기는  '마스터'에서 이병헌의 필리핀 영어 이상으로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가이리치의 초창기 영화를 더 찾아볼 수밖에 없다.



34.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1998)

(★★★ 3.5)

가이리치 감독의 데뷔작이자 제이슨 스테덤의 데뷔작. 이 영화를 보고 브래드 피트는 가이리치 감독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 '스내치' 출연을 부탁했고 마돈나도 반해서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하는데, 둘 다 이해가 된다.


'스내치'와 매우 유사한 영화라 두 편 연달아 보는데도 전혀 지겹지 않다. 액션과 코미디를 좋아하면 이 두 편은 반드시 봐야 한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를 먼저 보고 '스내치'로 가는 게 좋을 듯.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확실해졌다. 초창기 가이리치 감독은 천재였다. 하지만 남자가 너무 잘생기면 득 보다 실이 많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미리 깨달은 나는 한참 키 크고 잘생겨지려 할 때 자제했다. 이런 천재 감독이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톱스타들이 가만둘 리 있겠는가. 그렇게 그는 마돈나의 두 번째 남편으로 팔려갔다. 그런데 도대체 결혼 생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침마다 총명함이 사라지는 가루약을 시리얼을 타서 먹었던 것일까. 가이리치의 번뜩이는 두 작품 이후에 나온 영화들은, 곽경택 감독이 '친구' 이후의 작품들로는 계속 실망을 안겨준 것과 유사한 흐름이었다. 그나마 이혼 이후 셜록홈즈 시리즈 등으로 명예를 조금 회복하긴 했다. 그래도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쉽다.


좋은 감독들은 영화계의 발전을 위해 너무 잘생기지 말았으면.



35. 미니언즈 (Minions, 2015)

(★ 1.5)

'마이펫의 이중생활'을 보고 일루미네이션을 너무 극찬했었나 보다. 새로운 영화를 볼 땐 일단 의심부터 하는 지우가 '마이펫의 이중생활'을 만든 사람들이 만든 영화라고 했더니, 잽싸게 뛰어왔다. '마이펫'에서 그들의 상상력이 좋았는데, 이 영화에선 상상력의 과다분비로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돼버렸다.



36. 서칭포슈가맨 (Searching for Sugar Man, 2011)

(★★★ 4.5)

다큐멘터리 영화. 오래된 가수들을 찾는 "슈가맨"이란 방송 프로그램의 이름을 이 영화에서 따왔다고 한다. 영화 제목과 포스터만 보면 절대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영화인데, 일단 틀었다. 근데 이건 뭐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가슴이 벅차오른다. 시놉시스를 알고 봐도 괜찮은 영화겠지만, 나처럼 전혀 모른 채 보기 시작하면 전율을 느끼게 된다.


"가난하다고 꿈마저 가난한 것은 아니다."



37. 디스트릭트9 (District 9, 2009)

(★★★☆ 3.5)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의 격리 공간인 District 9. 난 SF 물을 좋아하지도 않고, 특히 에일리언처럼 못생긴 생명체가 나오면 항상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데, 이 영화에선 엄청난 디테일로 랍스터와 메뚜기의 단점들만 합쳐놓은 듯한 정말 못생긴 외계인들이 나온다. 그것도 음흉한 음악이 깔리며 겁주려고 느닷없이 등장하는 게 아니고, 그 '랍스터와 메뚜기의 단점 조합 생명체'가 주연이자 조연이자 엑스트라다. 그런데 전혀 SF물스럽지도 않고, 흉측하거나 무서워 눈을 질끔 감을 일도 없다.


그 외계인들은 독을 뿜거나, 뱀 같은 혀가 길게 나와서 사람의 목을 조르거나, 사람을 돌돌 말아 공처럼 던져버리지도 않는다. 그런 능력치가 없다. 그들은 일대일로 맞짱을 뜨면 사람에겐 겨우 이길 것 같은데, 일단 쪽수에서 완전 밀리는 데다가 사람은 무기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저 꼼짝없이 당하며 지내는 연약한 생명체에 불과하다. 좋아하는 음식도 고양이 사료다. 그래서 영화에선 그들의 신분이 그저 '난민'에 불과하다. 지구에 온 이후 28년 동안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District 9에서만 통제받으며 살고 있는 불쌍한 난민들.


그들이 어디서 왔고 왜 지구에 불시착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외계인들이 불시착한 곳이 하필이면 남아공인 것은, 흑인들이 난민처럼 살아야만 했던 남아공의 극심했던 인종차별을 풍자한 것이리라. 외계인들로부터 삥을 뜯는 나이지리아 갱단은 아주 사악한 존재들이고, 그들을 가지고 비밀리에 마루타처럼 외계 실험을 하는 백인들은 더 사악하게 묘사되어 있어, 결국 우린 불쌍한 외계인들을 응원하게 된다.


'반지의 제왕'의 필터 잭슨 감독이 제작을 맡아, 그 흉측한 외계인들로부터 부성애까지 이끌어낼 만큼 고퀄로 만든 영화. 3년 후 돌아온다며 떠난 외계인이 2편으로 꼭 돌아와 줬으면 한다.



38. 시티오브갓 (City of God, 2002)

(★★★ 4.0)

'District 9'의 인간 편. District 9이 외계 생명체를 격리시키기 위해 만든 구역이라고 하면, 브라질 리오의 빈민들을 도심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만든 구역을 '시티 오브 갓'이라 부른다. District 9만큼 처참한 공간이고, 아이들조차 줄담배 피고 마약을 나르고 무표정하게 총질을 해댈 만큼 희망이 없는 공간이다. 웬만해선 영화에서 아이들은 죽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이 영화에선 마치 홀짝 놀이를 하 듯, 두 아이 중 누굴 죽일까 고민하는 섬뜩한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기어이 한 명은 죽인다. 살아서 20세를 맞이하면 운이 좋은 곳, 그곳이 '시티 오브 갓'이다.


하지만 감독은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어설프게 희망을 주려 하지 않았다. 단지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빈민가의 실상을 그대로 전달하려 했을 뿐. 이런 무거운 영화를 세련된 카메라 워크와 영상미로 생각보단 불쾌하지 않게 전달한다. 우린 이런 영화를 대작이라 부른다.


이 영화를 작년에 봤다면, 와이프를 브라질 올림픽에 혼자 보내지 않았을 듯하다. 물론 내가 아니라 아이언맨이 따라갔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곳이 '시티 오브 갓'이다.



39. 하하하 (Hahaha, 2009)

(★★★ 3.0)

홍상수 감독의 영화로 김민희가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날, 홍상수 영화를 한 편 더 봤다. 그의 20여 편 영화 중 이제 겨우 두 편을 봤지만, '북촌 생활'과 '하하하'는 정말 비슷했다. 등장인물들,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의 유치함,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는 스토리 구조, 대화 중간에 어색하게 줌을 당기는 카메라 워크까지 거의 비슷했다. 두 영화의 제목을 바꿔도 될 듯.


이런 저예산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배우진은 매우 화려하다. 배우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싯가에서 대폭 할인해서라도 출현하고 싶어 하나보다. 이 영화에도 김상경, 유준상, 문소리, 예지원, 김강우, 윤여정, 김규리가 등장한다. 일주일 만에 다 찍었을 것처럼 대충 만든 걸로 보이는데, 이런 좋은 배우들의 연기 내공을 보일만한 장면들도 별로 없다. 우리 복싱 동아리 후배들을 배우로 써도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단 생각도 했다. 서로 '어색하게 연기하기'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묘하게 몰입이 된다. 그게 나 같은 영화 초짜들이 가늠하기 힘든, 배우들의 내공이고 홍상수 감독의 후덜덜한 능력인 것 같다.


'북촌방향'에서도 그랬지만, 이들은 밥 먹을 때마다 술을 마신다. 할 일도 참 더럽게 없는 사람들이다. 대화 내용도 시시껄렁하고 별 의미도 없다. 국어 교과서의 철수와 영희가 사춘기 지나고 살짝 까져서 나눌법한 대화들이다. 그런데 두 명이 마시더라도 테이블 위엔 소주병이나 맥주병이 항상 세 병이 놓여 있다. 술을 둘이서 마셔본 기억도 거의 없고, 게다가 인당 1병 이상씩을 마셔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점심 반주로 2인 3병은 너무 과하게 느껴졌다. 내 맘을 알아챘는지, 술을 별로 마시지 않은 설정을 해야 할 땐, 테이블 위에 두 병만 놓여 있었다. 정말 다들 그렇게 마시며 사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이제 그만 볼지, 더 찾아서 볼지는 고민 좀 해봐야겠다.



40. 그랜 토리노 (Gran Torino, 2008)

(★★★ 3.5)

'업'의 칼 프레드릭슨 할아버지가 만화를 찢고 현실에 나타났다. 이쯤 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배우로보다 거장 감독으로 불려야 한다. 이 영화를 제작 연출 주연을 했던 2008년 당시 클린트 옹께서는 이미 79세셨고, 85세인 2014년에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무려 87세인 2016년에 '설리 : 허드슨강의 기적'을 감독했다. 클린트 옹은 이제 자신과 서서히 헤어질 준비를 하라며, 이 작품을 만든 것 같다.


클린트 옹께선 비록 공화당 지지자로서, 그리고 트럼프를 지지한 몇 안 되는 배우로서, 반 트럼프 운동의 중심인 헐리우드에서 따 아닌 따를 당하고 있지만, 영화를 끌어가는 힘만은 진영을 뛰어넘어 박수받을만하다.


마지막 장면, "Do you have a light? Oh... I've got a light."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클린트 옹이 직접 부르는 OST 음악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대작으로 불릴만하다.  



41.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Sicario, 2015)

(★★★ 4.0)

영화 평론가들의 추천 영화 리스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영화 중 하나. 감독의 사실적인 연출력의 백미를 볼 수 있는 영화. 불꽃 튀는 총격전이 없어도, 도심을 가로지르는 검은색 SUV들의 행렬이나 Night Vision 고글을 쓰고 동굴을 탐색하는 조용한 장면만으로도 맥박이 빨라지고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온다.


'구니스'에서 주인공 형님 역할로 나온 조쉬 브롤린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주연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영화 고르는 안목이 탁월한 듯하다. 그리고 감독인 드니 빌뇌브는 이 영화에 이어 '컨택트'까지 2 연타석 홈런을 치며, 명실상부한 헐리우드 거장 감독 대열에 올라섰다. 그러고 보면, 컨택트에서도 외계인을 실루엣으로 처리하고 자세히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더 긴장감을 끌어올렸었다. 그만큼 연출력이 탁월한 감독이다. 개인적으론 '컨택트'보단 이 영화를 훨씬 재미있게 봤다.  


드니 빌뇌브의 후속작이 라이언 고슬링과 해리슨 포드 주연의 '블레이드 러너 2049'라니, 영어로 표현하면, "OMG, I can't wait!"



42. 조작된 도시 (Fabricated City, 2017)

(★ 2.5)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스터'의 강동원이 떠오른다. 강동원은 '마스터'에서 맡은 배역에 비해 쓸데없이 잘생겼었는데,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조작된 도시'는 유치한 중딩 영화가 될 수 있는 많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 이상으로 잘 만들었다. 기자들이 아무도 찾지 않는 마이너리그에서 노히트노런을 한 기분. 그래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감독을 찾아봤더니, 과거 '웰컴 투 동막골'의 박광현 감독이었다.


박광현 감독에게 이 작품은 '웰컴 투 동막골' 이후 무려 12년 만의 차기작이었다. 이 분의 지난 12년이 괜히 부러웠다. 그래도 감독 입장에서는 12년 만의 작품이라, 치고 올라오는 신진 감독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경차 마티즈가 전격 제트 작전의 '키트' 이상의 성능과 내구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창욱은 F1의 레전드 미하엘 슈마허보다 운전을 잘했다.



43. 시리어스 맨 (A Serious Man, 2009)

(★★★ 3.5)

'인사이드 르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이은 코엔 형제의 세 번째 작품. 이 작품은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좀 더 가볍고 유머스러운 장치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코엔 형제의 작품은 어설프게 철학적 메시지를 찾아내려 애쓰기보단, 그냥 영화 자체를 즐긴 후 전문가들의 해설을 보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 나에게 코엔 형제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괜한 수고를 하지 말라며 주제를 미리 알려 준다.


"Receive with simplicity all the things that happen to you"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이런 두괄식 좋아. 주인공은 자신에게 연이어 벌이지는 악재들에 허탈하게 "what?"을 외치며 답을 구하고자 하지만, 세상에 답은 없으며 그게 뭐 중요하냐고 되묻는다. 직장 문제든 건강 문제든 이혼 문제든, 없는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지지직거리는 TV부터 고치자.



44. 자전거 탄 소년 (The Kid With A Bike, 2011)

(★★★ 3.0)

주인공 아이가 단 한 번이라도 우는 장면이 있었다면 이 영화의 울림은 훨씬 적었을 것 같다. 또한 감독이 배경을 설명하거나 이 소년을 동정하려 했다면 뻔한 멜로드라마가 되었을 것 같다. 그런 뻔한 공식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저 아이의 무표정만 가지고도, 두려움에 떨거나 꺼이꺼이 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슬픔, 좌절 그리고 의지가 느껴진다.  


굳이 억지로 짜내지 않는 이런 영화가 편안하다.



45. 패신저스 (Passengers, 2016)

(★★★ 3.0)

너무 먼 곳만 바라보다 보면 지금 주어진 것을 알 수 없다. 조금 뻔한 주제지만 배경이 우주선이란 것이 신선했다. 하지만 여주인공 제니퍼 로렌스가 하필이면 트럼프의 딸 이방카를 닮아서, 창밖으로 화려한 우주쇼가 펼쳐지는 배경에서도 난 이 로맨스에 몰입할 수 없었다. 사실 이방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태어나서 보니 아빠가 트럼프인데. 제니퍼 로렌스가 전 세계에서 가장 수입이 많은 여배우 1위라는데, 그 점도 이방카와 닮았다. 덴장, 트럼프가 나의 영화 감상을 방해할 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 평을 위해 영화로 다시 돌아오면... "나라도 깨웠다."



46. 홀리모터스 (Holy Motors, 2012)

(★★★ 3.0)

영어 사전 씹어먹으며 단어를 외울 때, bizarre라는 단어가 멋있게 느껴졌다. 프랑스어에서 가져온 단어라서 스펠링이 기괴하여 '기괴한'이라고 외웠었다. 이 단어를 한 번쯤은 제대로 써보고 싶었는데, 자주 접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지워졌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후 이 단어가 갑자기 떠올랐다. '홀리모터스', 정말 bizarre 한 영화다. 우연히도 프랑스 영화라 이 단어 이상의 표현은 찾을 수 없을 듯하다.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순위에서도 16위에 랭크되어 있고,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영화. 다만 네이버 전문가 평점이 자그마치 8.84인 것을 보고, 이 영화 엄청나게 난해하고 재미는 없을 것 같은 느낌은 들었다.


토요일 밤에 와이프와 함께 이 영화를 봤는데, 와이프가 "이 영화 뭐야?"라는 질문을 세 번 정도 한 것 같다. 질문이라기 보단 혼잣말이었겠지. 나도 이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모를게 뻔하니. 러닝타임 내내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알로하'같은 영화나 볼 걸.


영화가 끝나고, 레오 카락스(Leo Carax)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봤다. 아, 1991년 '퐁네프의 연인들'의 감독이었구나. 그 이후 영화를 몇 편 만들지 않은 걸로 봐서, '퐁네프의 연인들'로 평생 걱정 없을 만큼 벌어놨거나, 영화에 대한 자부심과 고집이 대단한 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bizarre 하게 나온 주연배우 '드니 라방'은 '퐁네프의 연인들'에서도 남자 주연배우였다. 그리고 카락스 감독의 직전 작인 2008년 '광인'이라는 작품에서도 '드니 라방'이 하수구에 사는 괴물로 출연했는데, '홀리모터스'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에피스드로 하수구에 사는 괴물 캐릭터를 그대로 썼다. 이 쯤되면 감독으로서 '레오 카락스'와 배우로서 '드니 라방'은 도토리 꽤나 주고받은 일촌임이 틀림없다.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모호하지만, 몇몇 bizarre 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를 다 본 후 꿈자리도 사나웠다. 영화를 보며 What the F***을 외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47.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 2008)

(★★★ 3.0)

처음 보는 장르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영화. 1982년 레바논에서 벌어진 3천여 명의 학살을 둘러싼 이야기.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을 하면 이를 잊어버리는 증상이 있는데, 감독은 그 현장에 있었지만 학살 장면을 기억하지 못한다. 맨 인 블랙에서 빛을 쏘아서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것처럼, 특정 순간만 잊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감독은 당시 함께 있었던 전우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씩 기억을 끄집어낸다. 진짜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어쩌면 감독 역시 그 현장에서 조력자로 있었다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 영화라는 도구를 사용했을 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우기는 것이 개인기가 되어버린 세상이라 의심부터 들었다. 더구나 82년 레바논 학살에 대한 배경을 좀 더 살펴보기엔, 17년의 우리나라가 더 어지럽다. 더 들어가진 말자.


대학시절 사회학 개론이나 심리학 개론 시간에 보여주고 리포트를 써오라고 숙제를 내줬을 것 같은 다소 불편한 영화. 그래도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영화 장르의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  



48. 벤다 빌릴리 (Benda Bilili!, 2010)

(★★★ 4.0)

'서칭포슈가맨'의 '시티오브갓' 버전. 저마다 장애를 가진채 콩고의 시골마을 판지 위에서 노숙하는 벤다빌릴리 밴드 멤버들은, 돈을 벌면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싶다고 한다. 원래 연달아 두 편을 보려 했으나, 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다른 영화로 이 감정을 덮는 것은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별 것 아닌 일에 자꾸 투정을 부리고 싶은 사람이나, 진정한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꼭 한 번 봐야 하는 영화.



49.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Buena Vista Social Club, 1999)

(★★★ 3.0)

'서칭포슈가맨'과 '벤다 빌릴리'를 본 김에 음악 다큐멘터리의 레전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까지 봐야지. 남아공, 콩코에 이어 이번 무대는 쿠바. 그래서 더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순서가 잘못되었다. '벤다 빌릴리'를 보고 이 영화를 보면, 마치 광장동 마약 떡볶이를 두 그릇 먹은 후 심심한 평양냉면 한 그릇을 먹는 기분이었다. 쿠바 뮤지션들도 나름 힘들게 살았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들은 사지가 멀쩡하고, 지붕에 덮여 있고 수돗물이 나오는 집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순서의 중요성.



50. 최악의 하루 (Worst Woman, 2016)

(★★★ 4.0)

독립영화계에선 계속해서 좋은 감독과 배우들이 나오고 있구나. 김종관 감독 작품은 이제 한 편을 본 것에 불과하지만, 이 영화만 놓고 봤을 땐 홍상수 감독의 밝고 세련된 버전이다. 모든 것이 과하지 않아 편안했던 영화.


김종관 감독의 초기 작품인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라는 6분짜리 단편영화를 찾아서 봤는데, 자신 있게 문제를 푼 후 답안지에서 정답을 확인한 기분이다. 이제 제대로 김종관 감독의 덕후가 되기로 했다. 정유미와 한예리라는 좋은 배우들을 발굴해 낸 안목까지 지녔다.


김종관 감독의 후속작 '더 테이블'은 올봄에 개봉한다는데 주연도 무려 임수정, 정유미, 한예리.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기다리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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