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희망과 빛에 대한 생각
얼마 전에 스페인 희곡을 읽었습니다.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작가님이 쓴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와 <어느 계단의 이야기>입니다. 삶이란, 한계를 지닌 우리가 그 벽을 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며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부수기에도, 뛰어넘기에도 가장 어려운 벽은 내가 스스로 만든 벽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배경은 시각 장애인 학교입니다. 학생들은 학교가 마치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행복하다고 하죠. 그러나 이그나시오라는 학생이 오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그나시오는 즐거움에 취해 있는 그들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볼 수 없는 자기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안 속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내 안에 일어나는 갈등, 나와 바깥의 갈등을 모른 척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작가님은 우리가 짚어 봤으면 하는 생각을 더 날카롭게 전하기 위해 시각 장애인들을 등장시켰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결국 우리 이야기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으면서 다 보이는 듯 살고 있으니까요.
희망은, 빛은, 웃음 짓고 있는 인형과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인형은 그저 사람들이 자기 좋자고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희망은 어둡고 쓸쓸한 것입니다. 질 것 같아도 이겨보려고 덤비는 또는 버티는 힘, 깨닫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누구한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은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한 싸움. 그것이 희망이고 빛나는 사람입니다.
현실이 편안하고 아름다운 건 내가 그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쪽은 보지 않기 때문이죠. 세상을 너무 꼬아보는 것도, 내 눈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내가 믿고 따르고 싶은 것이 실은 거짓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 희망과 빛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모두가 달고 짠 것에 빠져 있을 때, 그대는 심심한 것 하나를 되새기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그 노력과 마음을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 때문에 더 오래, 멀리 뻗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이로운 고민을 하고, 새로운 것들 속에서도 바탕이 되는 것을 꽉 잡고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아이고, 말이 길어졌네요.
오늘은 일본말투 '-과의'와 '-와의'를 덜어보겠습니다. 예문이 너무 엉터리인 것은 좀 더 많이 손보겠습니다.
요즘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늘 답글이 늦어 미안합니다. 어째서인지 SNS로는 말을 잘 못하게 되네요. 좀 늦더라도 따뜻한 마음씨로, 그저 짠하게 봐주세요.
고맙습니다.
ㄱ.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환경 속에서의 타인과의 상호작용은 개인의 자아를 형성을 한다.
(→우리는 모든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 하며 자아를 형성한다.)
ㄴ. 사회와의 불협화음은 고립감과 내면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면 외톨이가 된 것 같고, 마음이 서지 않는다.)
ㄷ. 가족 및 지역 사회 구성원과의 정기적 상호작용하는 개인은
(→ 가족과 지역 사회 구성원과 꾸준히 관계를 잇는 사람은)
예문 ㄷ에서 ‘및’은 중국글자에서 따온 것입니다. ‘-과’나 ‘-와’로 고쳐 써야 바람직합니다.
ㄹ. 도시 개발은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 자연환경과)
ㅁ. 지난 분기 실적은 당초 목표치와의 괴리가 커
(→ 처음 목표에 한참 못 미처)
ㅂ. 한밤중 고요 속에서 나 자신과의 솔직한 대화는
(→ 나와 나눈)
ㅅ. 어릴 적 할머니와의 추억은
(→ 할머니와 함께 한)
ㅇ. 오랜 방랑 끝에 고향 마을과의 재회는 있고 있던 평온함을 주었다.
(→ 돌아온 고향 마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