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보이는 건 껍데기일 수도 있어.
한낮인데 하늘이 허옇게 버글버글 끓고 있다. 쥐들이 몸을 숨기고 참새들은 깃털을 부풀린다. 개구리들은 연약한 뒷다리로 땅을 헤집고 파고든다. 오늘따라 엄마 아빠도 퍽 지쳐 보인다. 말을 아끼고 잘 움직이지 않는다. 주전자에 끓인 차를 몇 잔 째 나눠 마시고 있다.
“벌써 10시네. 추운데 애들 그냥 오지 말라 할 걸 그랬나…”
엄마가 핸드폰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뜸을 들이다가 좀 더 크게 말했다.
“몇 포기도 아닌 거 그냥 우리끼리 해버리는 게 낫겠네. 예전에는 삼백포기도 나 혼자 다 했어.”
“그러세.”
아빠는 평상 위에 장판을 펴고 채반에 쌓아둔 절임 배추들을 두세 포기씩 엄마 앞으로 날랐다. 엄마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양념을 한 줌 쥐어 배춧잎 한 장 한 장에 고루 묻히고 버무렸다. 파리하던 배추들이 손에 잡히는 족족히 얼룩덜룩해진다. 양념이 다 된 배추는 둥글게 뭉쳐서 속이 깊은 통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빠가 뚜껑을 덮어 똑딱 잠그면 한 통이 끝난다.
오늘은 나도 좀 이상하다. 초라하게 시들어가는 것들을 눈앞에서 싹 치우고 싶다. 그게 엄마 아빠라 해도 말이다. 이따금 호미 같은 모양으로 엉거주춤 서서 숨을 돌리는 꼴이 영 사납다. 아니, 내가 사나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삼 남매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엄마 아빠는 어물쩍하는 법이 없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일이었다는 듯 군소리 없이 눈앞에 일을 하나씩 해치운다. 하나 둘 셋넷. 크고 작은 통이 모두 김치로 채워진다. 아빠가 마지막 뚜껑을 닫을 때까지도 삼 남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김장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여기저기 튄 양념들을 헝겊으로 꼼꼼히 닦았다. 장판과 대야, 채반들도 씻어 제자리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 평상 위를 몇 번이나 물걸레질한 뒤에야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았다.
“이따 애들 오면 놀라겠지?”
엄마는 한껏 구부러진 자세로 앉아 말했다. 고무장갑을 벗은 손은 벌겋게 퉁퉁 부었다.
“잘했지.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양쪽 집 왔다 갔다 함서 김장하면 힘들 것인데.”
“됐어, 됐어. 속이 다 후련하네!”
그때 마당으로 잿빛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다. 마늘을 심던 날, 보라가 ‘오빠’하고 부르던 남자와 웬 여자가 함께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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