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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만약에 오늘이 봄이라면

조용히 지나가길

by 김보영


무섭도록 많은 일이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봉오리가 열리고 쭈글쭈글하던 것에 살이 차오르고, 꼬부라진 것들이 펴지더니 날개가 된다. 날벌레들이나 새들한테서 떨어진 알록달록한 가루들이 정처 없이 떠다닌다. 무엇 하나를 끈덕지게 보고 있기 어렵게 또 다른 일이 눈앞으로 뛰어든다. 나는 넋을 놓고 있다가 사람들 소리에 겨우겨우 눈길을 창고 마당으로 거두길 되풀이했다.


모르는 남자들이 아빠가 시키는 대로 사다리 같은 걸 눕혀서 하나하나 연결했다. 사다리에는 커다란 깔때기 세 개가 띄엄띄엄 얹어있고, 투명한 상자도 하나 있다. 용태는 한쪽에 쌓아놓은 자루들 가운데 몇 개를 찢어 깔때기 두 개에 수북이 부었다. 진한 밤색으로 곱게 말린 흙이었다. 세 번째 깔때기에는 망에 든 누런 낱알들을 부었다. 볍씨라고 했다. 그리고 투명한 상자에는 뽀글머리 남자가 물을 얼마쯤 채웠다.


막둥이와 엄마는 깔때기와 투명한 상자를 지나 사다리만 늘어선 곳에 의자를 마주 놓고 앉았다. 손에는 흙이 든 바가지를 들었다. 가까이에 참빛이 젊은 남자 둘과 묵직한 네모 판을 바닥에 놓고 섰다.


“삼촌, 시작해요!”


막둥이가 창고 안쪽으로 고개를 쭉 빼고 소리쳤다.


뽀글머리 남자가 길쭉하고 얇은 네모 판을 사다리 위에 하나씩 올렸다. 네모 판이 흙이 든 깔때기와 물이 담긴 상자 밑을 차근차근 지났다. 흙이 깔리고 물을 머금은 다음, 볍씨가 깔리고 그 위로 흙이 얇게 덮였다.

가끔 흙이 덜 덮여서 볍씨가 드러나면 엄마와 막둥이가 흙을 한 줌씩 쥐고 있다가 뿌렸다. 그렇게 한 판이 완성되면 참빛과 남자들이 바닥에 깐 널찍한 판에 모양을 맞춰 쌓았다. 사다리가 제대로 움직이는지 살피던 아빠가 신동진은 삼백사십 개 쌓아야 한다고 한 번 더 일러둔다.


사람이 이렇게 많을 필요가 없는 일 같은데, 엄마는 까딱했다가는 일손이 부족할 뻔했다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누구 하나 자리를 비우면 깔때기에 든 흙이 동나거나 볍씨가 뭉텅 나오고, 판이 밀려 뒤집힐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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