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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내가 기억해야 하는 날들

by 김보영


이틀 뒤 뽀글머리 남자와 젊은 남자 두 명이 네모반듯하게 쌓았던 볍씨 판들을 창고 마당에 넓게 깔았다. 흙에 파묻혔던 볍씨들이 가늘고 작은 싹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당에 판을 다 깔자, 발 디딜 틈이라고는 일부러 판과 판 사이를 띄워 만든 좁은 길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분수대 몇 개를 놓아서 다니기가 사나웠다. 그래도 아빠는 날마다 그 길로 조심히 다니며 어린 벼들을 만졌다.

뽀글머리 남자가 와서 하얗거나 분홍색인 알갱이를 뿌리기도 했다. 등에 기계를 짊어지고 해야 하는 일인데 무거운 모양이었다. 몸이 이쪽저쪽으로 자꾸 기우뚱했다. 그러나 아빠는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짱짱하니 좋네.”


오늘도 어린 벼를 쓱 쓸어보면서 아빠가 말했다. 이제 어린 벼들은 푸릇푸릇한 잔디 같다. 아빠가 일어서는가 싶더니 그대로 다시 앉았다. 나는 맹꽁이가 어린 벼들 속에 숨는 걸 봤기 때문에 아빠가 쫓아내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빠는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한껏 더 움츠렸다.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려 눈길을 돌리니 엄마가 걸음마를 돕는 수레를 밀며 다가왔다. 아빠가 있는 곳은 길이 너무 좁아서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걷느라 한참 걸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린 벼들이 건널 수 없는 강처럼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한테 더 다가갈 수 없었다.


“용태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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