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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boy May 31. 2022

열여섯. 짙어지는가 흐려지는가

때론 없어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여러 개의 입이 모여 나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내가 변했다며 떠나고는, 마치 내가 그런 사람이길 바랐던 것처럼 나도 모르는 곳에 내가 가득하다. 이젠 내가 누군지 나조차 흐려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스스로 짙어져야 하는지 아님, 흐려져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 남들이 말하는 내가 정말 내가 맞는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내가 맞는지 오랜 시간을 생각하고 돌이켜봐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는 참 어렵다고 생각이 든다.


짙어기를 바랐던 나의 모든 사람이여 나를 부디 잊어주기를 살다가 한 번쯤이라도 나를 떠올리지 않기를 행여 나의 소식 들어도 괜찮은 듯 넘겨버리기를 때로 당신 때문에 지새웠던 밤들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지금 이맘때 이 계절을 나는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잊지 않고 누군가에게서 흐려지다 못해 지워지는 것을 택하려고 한다. 시간이 지나 내가 당신들에게서 흐려질 때쯤 이제 어쩌면 모든 게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락을 주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당신들은 내게서 짙어지겠지.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그 모든 걸 잊은 채로 행복할 거라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도록 그 긴 시간을 나아가야겠다. 그래야 흐려진 내 마음을 애써 들어다 보려 가까이 가지 않고는 주저앉아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머물다가 간 사람이라도 떠난다면 그것이 흐려지고 지워지는데 생각보다 힘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 애쓴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곁에 있을 땐 모르고 떠나가고 나서야 생각이 나듯 적어도 내 생각 한 번은 했으리라고, 내 욕 한 번이라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을 추억하고 그리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렇게 흐려지고 지워지는가와 가슴속 깊은 곳부터 새겨지는 사람으로 남는 사람도 있다.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 내 인생을 함께하고 고단한 하루의 마지막에 당신이 생각날 거라고, 함께하지 못하는 슬픔 속에 몇 날을 무기력함에 빠졌던 날이 있었다. 목포에 오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었던 적은 없다. 왜인지는 몰라도 누군가에게 흐려지는 것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곧 올라가면 이제껏 연락 안 했던 친구들과 약속이 잡히고 의미 없는 술자리와 내 걱정을 했다며 잘 지냈냐는 안부를 묻겠지.


그것이 거짓이라도 나는 웃으며 너희와 술잔을 맞추고 싶다. 나를 아직 잊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그저 껍데기뿐인 위로라도 내 곁에서 내 얘기 들어주고 너희 얘기해주며 즐거운 밤을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말이다. 결국 나는 또 여러 개의 입속에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혹여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날은 가장 보기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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