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적응할 수 없는 한 가지

by 너굴이

신주에서의 첫 주는 느린 듯 빠른 듯 지나갔다.


우리 집 거실보다도 큰 개인 사무실까지 제공되었고, 빠릿빠릿한 행정 직원 덕분에 혼자 헤매도 되지 않아서 행복했다 (2년 전 다른 학교에서는...으로 시작하는 타령은 이제 멈춰보겠습니다만 과연 될는지...). 사무실은 아무런 불편함이 없도록 셋업이 되어 있었고, 행정직원들이 공용 차로 캠퍼스 투어 및 숙소 근처의 거점 시설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어 감동을 이어나갔다. 학교 내 수영장 시설 이용권을 묶음으로 끊고 싶었지만 의사소통의 문제로 실패하자, 행정 직원이 나서서 도와주기까지 했다. 우왕. 아니, 대체 2년 전에는 왜...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숙소에 지내다 보니 마음이 넓어짐을 느낀다. 내가 외국인임을 아는 상대가 여전히 중국어로 막 떠들어도, 그리고 그게 내 귀에 바로 꽂히지 않아도, 여유 있게 "중국어를 잘 못하니 천천히 해달라"라고 말할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실제로 들으려고 노력하면 들린다. 쓰러질 것 같은 숙소에 따뜻한 물도 느리게 나오면서 벌레만 자꾸 나오면, '오늘은 어떻게 생명이 있는 존재를 척살할까'를 고민하느라 귀도 닫혀있고, 마음도 닫혀있고, 그러면 중국어도 안 들리더라 (그러니까, 2년 전에는 어땠냐면...)


하지만 비행이 너무 불편했던 걸까. 갑자기 하루아침에 패딩을 입다가 반팔을 입어야 하는 습한 곳에 던져놔서 그럴까. 몸이 돌아가면서 비명을 지른다. 처음엔 견갑, 다음날엔 꼬리뼈, 그리곤 척추기립근, 다음날엔 승모근, 등등. 처음엔 돌침대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침대가 알고 봤더니 그저 많이(x2) 딱딱한 스프링(그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매트리스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내 몸을 적응시키는 수밖에... 두 번째 방의 이불까지 걷어와서 토퍼로 썼더니, 뭐 아쉬운 대로 꼬리뼈에 멍이 드는 일은 방지할 수 있겠으나 오래 누워있거나 자세를 바꿔 잘 순 없었다.


밴쿠버 속에 녹아 있을 때엔 절대 알 수 없지만, 나와보면 가장 그리운 것이 깨끗한 공기. 대만도 공기의 질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 나같이 예민한 사람은 도착한 지 4일 만에 인후염을 얻을 수 있다. 원래 몸 상태도 좋진 않았겠지만, 딱 한 번(!) 2-3시간 번화가를 쏘다녔는데 하필 그날 미세먼지가 좀 많다 싶더니 금방 목구멍이 부어버렸다. 약을 임의로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그저 강황차와 따뜻한 물을 마시며 염증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짝꿍이랑 서로 나이가 들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이야기를 종종 나누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꼬장꼬장한 할머니에 (자동) 당첨되었고 굳이 반박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문득, 내가 꼬장꼬장할 소질이 다분하여 내 몸도 이토록 까칠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뭐가 되었든 좋으니 크게 아프지만 말아다오.


타이베이에서 좋아하던 다기 샵을 신주에서도 만나다니,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가장 가까운 번화가는 숙소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어 심리적 거부감도 훨씬 덜하다. 타이베이 매장보다 더 많은 아이템을 보유한 것을 보고 기쁨을 금치 못해 되지도 않은 중국어로 점원에게 말을 건다. 착한 사람들. 손짓발짓으로 헛소리를 해도 다 들어주는구나. 일단 부가가치세가 5% 정도로 캐나다보다 훨 싸고, 이미 final price tag에 포함되어 있기에 물건 구입에 심리적 여유가 생긴다.


대만의 길거리 풍경은 일본과 매우 흡사하거나 좀 더 회색이다. 원체 습하니 흰색을 간직한 건물 외벽은 없다. 고가의 주택이나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기본값은 콘크리트의 회색과 얼룩덜룩 끼여있는 습기의 흔적. 도심의 차도와 인도는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보이지 않는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대만의 거리는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깔끔할 수 없게끔 설계되었다면 너무 혹평일까. 습하고 많이 덥기 때문에 건물 1층에는 대부분 사람이 걸어 다니는 공간이 필로티 구조처럼 위가 막혀있다. 하지만 그 공간은 같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바닥이 들쑥날쑥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대만 사람들은 발에 눈이 달렸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계단이 나타나고 푹 꺼지거나 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누구 하나 걸려 넘어져서 발목이라도 나가면 건물주 혹은 시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인도 바닥은 누더기를 이어 붙인 것 같다.






대만에 왔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날씨와 습도요, 둘째는 자동차와 관련된 모든 순간이다. 도로에서 위협을 느끼는 순간은 2년 전에도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애초에 땅이 작고, 거대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프라가 아니기 때문에, 골목과 건물의 크기, 인도와 차도 등등 모두 작다 못해 오종종하다. 장개석의 어마어마한 야욕이 고대로 들어난 중정기념당을 제외하고는 건물이 대체로 낮고 좁다(덧: 자금성을 지을 생각이었는지 도심 한복판에 쓸데없이 크게도 지었놨다). 그나마 시가지는 번듯하게 차도가 4차선 이상으로 닦여 있지만, 행인인지 차량인지 정체성 위기를 늘 겪고 있는 오토바이 떼들과 최근에 등장한 킥보더들의 자유분방함이 더해져 도로는 늘 혼란스럽다. 인도가 구비될 만큼의 도로 폭이 나오지 않지만 사람은 다녀야 하니, 아스팔트 위에 분홍색 줄을 그어놓거나 초록색 페인트를 발라놓고 그곳을 "인도"라고 칭한다. 하지만 대만의 오종종함을 고려하지 않은 차량의 크기와 날다람쥐 같은 오토바이의 질주 앞에서 "인도"의 존재는 쉽게 잊혀진다. 행인으로서 지나다닐 때에는 신호등이 설치된 횡단보도에서도 여전히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다. 노숙자의 무단횡단일지라도 사람이 무조건 차보다 우선인 밴쿠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행인이 눈앞에서 뻔히 지나가도 멈추지 않는 차량의 호쾌함을 맛볼 수 있다. 전조등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걸 몇 번 겪다 보면, 신호등에게 무한 불신을 보내게 된다. 승용차고, 시내버스고, 트럭이고, 뭐 아무것도 멈추질 않는데 요상하게도 다들 충돌없이 요리저리 빠져나간다. 대만 사람들은 다 베스트 드라이버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신호등은 재미로만 본다. 보시다시피, 매우 귀여운 캐릭터가 초록불과 동시에 걸음을 걷기 시작하는데, 초록 인간의 느린 발걸음이 불이 바뀌기 직전에는 스프린트로 바뀌는 걸 볼 수 있다. 간간히 초록 인간으로 부족하면 초록 유니콘이 합세한 신호등도 있다.


IMG_9473 2.heic 초록 인간과 초록 유니콘. 신나게 달려서 어디까지 갈거양?


대만도 커피에 매우 진심인 나라인데, 구글맵에서 카페로 옵션을 좁혀보면 무슨 달마시안 무늬처럼 여기저기 빠짐없이 커피집이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핸드 드립 정도는 해 줘야 "카페"라고 불리울 수 있는건지, 카페마다 원두를 직접 볶아서 팔거나 시그니처 핸드 드립/콜드 브루를 내놓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이러다 보니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붕어빵의 꼬리를 못 먹고 버리는 느낌이 들어 매우 안타깝다. 디카페인으로나마 먹어보고 싶지만, 캐나다처럼 디카페인을 디폴트로 구비하는 건 아니라 자의 반 타의 반 티라떼만 주구장창 마시게 된다 (물론, 티라떼도 매우 맛있다). 속이 뒤집어질 각오를 하고 어쩌다 한 번 커피를 마시려면 외교 문서에 서명하는 수준의 신중한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면 더더욱 원두에 대한 설명을 꼼꼼히 읽어본다. 밴쿠버에서는 이탈리아식으로 원두를 강배전하는 곳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만에서는 다크로스팅도 흔한가보다. 입맛에 맞는 라떼가 얻어 걸렸을 때의 행복감이란.


IMG_9470.HEIC 맛있는 커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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