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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카야 Dec 14. 2023

영알못 K-아줌마
캐나다에서 후반전을 시작하다 #1

7년전 나는 45살 늦은 나이에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대부분 이민을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자녀 교육은 우리에겐 해당되진 않았다. 당시 대학에 다니는 큰 아이는 그냥 한국에 있으면서 곧 군대를 갈 예정이었고 중3이었던 딸은 바로 high school에 들어가는 게 적응이 힘들 것 같아 아이들이 오히려 우리의 이민을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에서의 우리 노후는 답이 없었다. 대출이 반인 수도권 아파트 한 채가 전 재산인 우리는 죽어라 맞벌이를 해도 노후 준비는커녕 죽어라 한 달 십만 원 저축하기도 힘들었다.

10년 넘게 강남바닥에서 영어유치원 원장으로 일하며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강남 사람들의 재력과 사교육은 흙수저인 내가 노력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몰랐다면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위안하며 그럭저럭 살았을 테지만 20년 전 남편의 유학차 밴쿠버에서 5년 정도 살았던 우리는 당시 너무나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외국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에겐 별희망이 없는 한국을 떠나 우리 인생에 마지막 도전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어치피 가진 게 없는 우리는 잃을 것도 없었기에...


남편은 바로 캐나다에서 그나마 직장을 잡기 쉬운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일 년 후 2015년 여름 우린 캐나다로 출발했다. 군대도 가지 않은 아들을 한국에 홀로 두고, 학원 영어가 전부인 사춘기 절정인 중3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른 45살의 우리는 새로운 출발에 대한 설렘보다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막연함과 불안감에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직장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외노자로서 삶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기술직이라도 영어가 서툴다 보니 인터뷰에서 족족 떨어졌고 겨우 인터뷰에 통과해 다니다가도 며칠 만에 해고 통지를 받기도 했다. 여기 기술직은 safety가 워낙 중요해 조그만 실수에도 바로 해고를 통보할 수 있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열 번 넘은 인터뷰 끝에 겨우 들어간 직장에서 남편은 온갖 눈치를 보며 열심히 일했지만 일도 서툴고 영어도 안되다 보니 일주일 만에 해고 통지를 받았다. 밤새 잠도 못 자고 아침에 다시 회사로 가 열심히 할 테니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단다. 그리고 다시 일하게 된 그 회사에서 온갖 보이지 않은 차별과 억울함을 버티고 2년 가까이 근무했고 그 덕에 우리는 영주권도 받고 집도 장만할 수 있었다. 나는 죽어도 그렇게까지는 못할 텐데 가장의 무게라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보다 센 거 같다.


평생 생계형 직장맘으로 일했던 나 또한 도착하자마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았다. 토론토나 밴쿠버처럼 한국 커뮤니티가 크지 않은 이곳에선 대부분 이민 온 아줌마들은 한국 슈퍼나 식당에서 일하는 분위기였고 그나마도 은근 경쟁이 치열했다. 이곳 캐나다에선 한국에서의 나의 경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고 인정을 해주지도 않았다. 사무실에서 전화받는 간단한 일조차 이곳 컬리지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지원이라도 해 볼 수 있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40이 넘은 나이에 너무 늦은 게 아닌가 고민은 되었지만 앞으로의 20년 어쩜 30년을 위해 2년만 고생하자라고 다시 학교를 다니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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