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남동생의 탄생은 우리 집의 공기를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기에, 온 가족은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새 생명을 맞이했다. 하지만 환희 뒤에는 부모님의 고된 육체가 남긴 흔적들이 있었다.
심한 허리디스크를 앓던 엄마와 온종일 물품을 나르고 납품하던 아빠는 약의 기운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우리 집에는 사시사철 한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때로는 늙은 호박 속을 파내 꿀을 가득 채워 찌는 보양식 냄새가 온 집안을 휘감기도 했다.
우리는 그 코를 찌르는 냄새에 진저리를 치며 입도 대지 않았지만, 훗날 마흔 즈음 만난 한 친구는
“그때 너희 집에서 나던 그 호박즙 냄새가 맛있어 보였어. 나도 한입 얻어먹고 싶더라”며 의외의 기억을 꺼내 놓기도 했다.
우리에겐 부모님의 통증을 억누르는 비릿한 향기였던 것이, 친구에겐 꼭 한번 맛보고 싶은 귀하고 달콤한 간식의 냄새였던 셈이다.
노산이었던 엄마는 아들을 낳은 포상으로 짧은 병원 생활을 마친 뒤, 고질적인 디스크 치료를 위해 전문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고작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와 중학생 언니였다. 하필 그해 늦여름은 장마가 기승을 부렸다. 쏟아지는 폭우에 물난리가 나고 급기야 단수까지 선언되었다.
골목길에는 급수차가 올라왔고 세대당 할당된 물은 턱없이 부족했다. 갓 태어난 남동생의 기저귀 빨랫감은 산더미처럼 쌓여만 갔다. 평소 같으면 귀찮은 일은 나 몰라라 했을 언니였지만, 그날은 달랐다.
언니는 동네 언니와 함께 빨랫감을 한가득 들고 관악산 기슭 계곡으로 향했다.
수돗물이 끊겨버린 상황에서, 어떻게든 기저귀를 세탁해야 한다는 판단이었을까. 놀이 반 노동 반이라 해도, 그 무거운 빨래 보따리를 짊어지고 계곡물에 기저귀를 흔들어 빨아 오던 언니의 뒷모습.
평생 엄마가 "맏이답다"라고 칭찬을 늘어놓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던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언니를 '맏이답다'라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동생이 백일이 될 때까지 녀석을 전담해서 돌본 것은 나였다. 고물거리는 아기가 너무 예뻐서 나는 틈만 나면 동생을 품에 안고 ‘깨물 깨물’하며 애정을 퍼부었다. 그 과한 사랑이 화근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동생은 내 품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때 생긴 ‘깨물기’ 습관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강아지나 고양이를 볼 때면 튀어나오는 나만의 독특한 애정 표현이 되었다.
엄마의 부재와 단수의 고통 속에서도 동생은 무럭무럭 자랐고, 우리 자매는 그렇게 조금 이른 ‘작은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돌벽 집의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한약 냄새와 계곡물에 갓 빤 기저귀 냄새가 뒤섞인, 우리의 열세 살 열네 살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