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후 1시 40분, 밤아의 하교 시간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밤아의 초등학교 주차장에 잠시 차를 대고, 밤아를 기다렸다. 밤아는 하교 후 삼삼오오 모여 생명과학이나 드론, 레이저사격 등 다양한 방과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언어 치료로 늘 바삐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밤아의 부러움과 욕구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고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어 치료 시간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 저 밤아랑 수업 못하겠어요.”
언어 치료 선생님께서 치료수업을 시작한지 10분 만에 문을 열고 나오셨다. 선생님의 상기된 표정과 한껏 격양된 목소리 톤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밤아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 같다. 평소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당황해서 밤아를 붙잡고 물어봤는데, 아이도 당황했는지 횡설수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50분 치료 수업에 7만원, 저렴한 금액도 아니고, 치료 센터까지 차로 왕복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자 밤아를 달랬다. 근데 하필 우리 다음 차례 학생이 그날따라 일찍 도착해서 대기 중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밤아의 수업이 10분밖에 진행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순서의 학생을 부르며 “oo야, 오늘 수업 일찍 시작하자.”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아무리 우리 아이가 큰 잘못을 했다고 한들, 우리 수업 시간 50분 중 고작 10분 지났을 뿐인데.. 그리고 교실 밖에서 아이를 달래는 시간도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시간에 다른 학생을 데리고 들어가신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상태로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다음 학생이 끝나는 시간까지 센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밤아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독해 문제집 틀린 것을 다시 풀라고 시켰는데, ‘틀린 거 왜 고쳐야 해요?’ 하고 저한테 눈을 막 이렇게(째려보는 듯한) 하면서 되묻길래 쫓아냈어요.”
허허.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치료에 임하는 학생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한 마디로 수업 중단이라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밤아의 공손하지 못한 태도도 문제였지만, 일단 그에 따르는 선생님의 리액션과 상담 태도, 그리고 우리 아이의 치료 시간에 다른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 상황에 너무 화가 나서 일단 집으로 왔다. 집에서 나도 화를 좀 가라앉히며 선생님께 문자나 전화 등의 피드백이 오기를 기다렸다. 수업 중단은 그렇다 쳐도, 오늘 수업료 7만원에 대해 보강을 하겠다, 또는 반액 환불을 하겠다는 등의 조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다음 날 언어 치료에 또 가서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 같아 보였던 선생님께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무마시켜보고자, 치료 센터로 가는 차 안에서 밤아의 잘못을 되짚어주었다.
“밤아야, 어제 선생님께 틀린 거 왜 고쳐야 하냐고 물어본 거 있지? 그거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해줄래?”
“문제집 푸는데, 자꾸 틀려서 선생님이 화냈어요. 그래서 이거 왜 고쳐야 하냐고 물어봤어요.”
나는 밤아의 대답을 듣고 두 가지 상황에 화가 났다. 물론 아이의 말만 들어서는 정확한 상황을 캐치할 수 없지만, 오래 전부터 나는 독해 문제집 푸는 치료수업 말고, 조음과 어휘 구사 등의 수업을 해달라고 수차례 말씀드렸다. 독해 문제집은 집에서도 얼마든지 풀 수 있고, 나도 선생님처럼 문장 하나하나 해석해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비싼 돈을 내며 독해 문제집 풀이 수업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고, 또 독해 문제집만 풀었던 언어 치료 시간에 화가 났고, 틀린 문제를 왜 고쳐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리액션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밤아는 선생님께 사과를 드렸고, 정상적으로 치료 수업이 진행되긴 하였으나, 선생님도 민망하셨는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고, 나 또한 선생님께 상한 마음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 날 중단했던 치료 수업에 대한 피드백도 전혀 없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선생님께 좋은 치료 수업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냉정한 판단이 필요했다.
치료 수업이 끝난 후, 원래는 바로 집으로 가는 날이었지만 그날은 복지관으로 가서 친한 엄마들을 만나 치료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밤아 엄마. 이참에 밤아 언어 치료 좀 줄여~ 밤아한테 변화를 주는 것도 좀 필요한 것 같아. 너무 한 선생님한테 오래 치료받았어.”
“그래, 맞아. 언어 치료 하나 줄여도 다른 치료기관 두 개나 더 다니잖아. 밤아 미술 잘 하는 것 같던데, 차라리 그 시간에 미술을 더 시켜봐. 우리 동네에 ㅁㅁ예중 있는데, 거기 한 번 도전해보는 거 어때?”
띠옹~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우리 같은 상황에 ‘ㅁㅁ예중’이라니, 어이가 없다는 표현이 아니라, 캄캄한 동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 같았다.
“ㅁㅁ예중이라니 무슨 소리야~ 우리가 거길 어떻게 가~?”
라며 나는 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했다. 하지만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들뜬 마음으로 집에 들어와서는 바로 컴퓨터를 켜고 검색했다. ㅁㅁ예술중학교.
컴퓨터의 화면이 바뀌고, ‘ㅁㅁ예중 입학 전형 요강’을 클릭하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래, 이거야!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 무한 반복되지만 오랜 정체기를 걸었던 언어 치료와 달리, 나에게는 신선한 도전의식, 밤아에게는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활기찬 미래!
ㅁㅁ예술고등학교는 장애아동 대상 특별전형이 있지만, 중학교는 특별전형이 없었다. 비장애 아동들과 함께 똑같이 시험을 봐야 한다. 학과면접(교과목 지필고사), 소묘와 수채화 시험을 3일에 걸쳐 치러야 한다. 많이 어렵겠지만, 너무나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 남편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여보, 우리 밤아 ㅁㅁ예중 도전 한 번 해볼까?”
“ㅁㅁ예중? 가능할까? 해보고 싶으면 해봐.”
괜히 물어봤다. 우리 남편은 내가 한다면 무조건 찬성한다는 스타일이라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등의 일절 질문도 안 하고, 그저 해보고 싶으면 해보란다. 그냥 ‘밤아 ㅁㅁ예중 입학시키는 거 도전해볼래.’ 라고 통보할 걸 그랬다.
오랜 고민도 필요 없었다. 내 인생 이렇게 밝은 빛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직진이다. 그날 밤, 밤아를 쫓아낸 언어 치료 선생님께 치료를 중단하겠다고 연락드렸다. 선생님도 쿨하게 알겠다고 하셨다. 미련 없는 중단, 그리고 값진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