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아와 학교 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하고부터는 나의 자유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보통은 오후 1시부터 저녁 먹은 후 정리하는 시간까지만 바쁘고 그 이후에는 나만의 자유 시간을 누렸었는데, 밤 11시까지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어졌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를 못 가니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아이들에게만 매달려서 ‘자아’를 잃은 듯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인공 와우수술을 받고, 남들보다 몇 년이나 늦게 시작한 밤아의 인생에 짜릿한 목표가 생겼다는 사실이 ‘자아’를 잠시 내려놓은 나의 자유보다 훨씬 소중했고 즐거웠다.
밤아와 함께 가장 중점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일단 수학이 현행 과정보다 조금씩 앞서가야 아이가 학교에서 헤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2~3년 앞서는 선행학습은 못해도 한 학기 정도 예습은 해두자는 마음으로 속도를 냈다. 각도 재는 단원이나 간단한 도형 같은 단원은 큰 어려움 없이 잘 했다. 그런데 큰 수의 곱셈과 나눗셈 같은 처음 접해보는 것들과 분수의 덧셈, 나눗셈은 생각보다 어려운 듯 보였다. 한 두 번 설명해서 잘 안 되는 부분은 ‘될 때까지’ 연산 문제집으로 단련했더니 능숙하게 잘 풀 수 있게 되었다.
수학 다음으로 많이 했던 과목은 사회였다. 처음에는 쉬운 듯 하지만 학기가 지날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과목이 사회이다. 나의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은 함경산맥, 마천령산맥, 낭림산맥, 태백산맥 등 산줄기를 줄줄 외우고,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남강 등 강줄기도 틀리지 않고 외워야 하교가 가능했던 아찔한 기억이 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라떼’만큼 남북한의 산맥과 강들을 줄줄 외우지는 않지만, 그래도 강원도가 강릉과 원주를 합친 지명이고,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를 합친 지명이라는 정도는 훑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외울 것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 밤아는 잘 외우는 것처럼 보였으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구멍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발음 오류로 인한 오답 발생이었다.
언어치료를 계속 하기는 했지만, 밤아가 조금만 신경을 안 써도 흐트러지는 발음으로 인해 지명과 익숙하지 않은 어휘를 외우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충청도’라고 읽고 외우지만, 외우는 동안 ‘충청도’가 ‘춘천도’로 잘못 발음이 되고 그대로 시험지에 ‘춘천도’라고 적고 틀렸다. ‘삼전도비’도 제대로 외우다가 어느새 ‘삼정도비’가 되고, 시험지 위의 ‘빨간 소나기’를 남기며 마음의 상처를 줬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지명이나 교과 속 어휘들을 제대로 발음하고 외우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고, 인내심 부족한 엄마의 멘탈에도 가끔씩 화가 찾아와서 공부 잘 한다고 칭찬받다가, 발음 틀린다고 지적당하는, 희비 엇갈리는 시간과 함께 ‘이것은 언어 치료인가, 공부인가’ 헷갈리는 시간을 무척이나 많이 경험했을 우리 밤아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고학년이 되면 슬슬 시작하게 되는 한국사. 다행히도(?) 유선형으로 설계된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한반도의 유구한 역사를 가볍고 넓게 배우며, 약간의 반복과 함께 그 깊이를 더해가기 때문에 차근차근 진도 나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공부할 수 있다. 다만 쉽다고 무시하고 공부를 놓는 순간 암기 덩어리 골치 아픈 한국사가 될 수 있다. 한국사 부분은 나중에 어려워질 때 참고할 EBS 프로그램 하나를 미리 선정해놓고,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정도는 교과서와 시중에 나와 있는 역사책들을 구입해서 워밍업을 하기로 했다.
국어 과목은 사회에 비해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언어 치료 시간에 독해 문제집을 너무 많이 풀어서 사실 국어를 따로 공부해야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교과서를 읽다가 발견한, 지금까지도 문제가 많이 되고 있는 ‘동시’ 부분이 블랙홀. 밤아는 시에서 등장하는 은유법과 직유법에 대한 이해도 많이 떨어지는데, 특히 의성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콩 던지는 소리 같다’는 표현을 이해 못해서 직접 콩 몇 알을 바닥에 던져줬는데, 그 소리가 인공 와우를 통해 제대로 전달이 안 되고, 실제 비 오는 소리도 인공 와우를 통하는 순간 그저 소음으로밖에 안 들리니 동시를 이해시킬 방법이 없었다. 소리 자체를 인공 와우를 통해 전기 신호로 바꾼 소리로 듣게 되니 병아리가 ‘삐약삐약’ 울어도 ‘삐약삐약’이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현실이 어찌 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이기도 했다.
탕탕-
땅바닥을 두들기고
탕탕탕-
담벼락을 두들기고
탕탕탕탕-
꽉 닫힌 창문을 두들기며
골목 가득 울리는
소리
(「공 튀는 소리」 中, 신형건)
똑같은 ‘탕’의 연속이지만, 가리키는 소리가 제각각인 이 시의 청각적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는지, ‘그냥 외워’, ‘그냥 읽어’라고 하기에는 그 시 안에 담긴 감성들이 전달되지 않으니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입장도 서로가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과학은 그나마 수월했다. 아마도 아직 고학년이 아니어서 비교적 쉬운 내용이 다루어지기도 했고, WHY 학습만화, ‘내일은 실험왕’ 시리즈를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오히려 오랜만에 교과서를 본 나보다 밤아가 훨씬 잘 알았다. 가끔은 밤아가 교재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학습 만화도 ‘만화’라고 못 보게 하는 부모님들께 학습만화가 주는 학습적인 장점을 꼭 어필해드리고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꼭 필요한 실험은 ‘내일은 실험왕’의 부록으로 나오는 실험 키트를 이용하거나, EBS 과학 방송의 실험 영상을 찾아서 함께 시청하기도 했다.
엄마가 집에서 매일 몇 시간씩 집중적으로 과외를 해도 사회는 어휘와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고, 국어는 매 학기 등장하는 동시를 마주할 때마다 감각적 표현들에 대한 의미 전달에 있어 밤아가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엄마와의 공부가 이제 시작이지만, 밤아의 학습에 따르는 어려움을 직접 마주해보니 남한테 돈 주고 과외 맡겨서 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이건 무조건 나의 일인 것 같다. 앞으로 몇 년 간은 가정 학습을 우리 안에 시스템화 시키고 아이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나도 밤아 앞에서 헤매지 않도록 준비를 많이 해야 할 것 같다는 걱정과 부담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