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가면 그 시대의 화두를 알 수 있다. 코인 투자, 메타버스, 챗GPT, 부동산, 건강, 다이어트, 자기주도학습, MBTI 등 매대에 올라가 있는 책들의 제목만 봐도 그 시대가 추구하는 것들이나 유행거리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즘 시대 자녀교육 분야의 화두는 무엇일까? 단연코 자존감과 문해력일 것이다. 사실 굳이 자녀교육이라는 분야로 엮지 않아도, 자존감과 문해력은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긴 하다.
나도 MZ세대이지만(MZ에 겨우 낀 세대이지만), MZ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은 꼰대스럽기도 하고 혁신적이기도 하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유행일 정도로 ‘내가 자라온 과거’를 고집하기도 하면서, 유교 중심의 전통 사상을 탈피하려는 과감한 시도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기도 하는,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 세대인 것 같다. 이 MZ 부모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이의 자존감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사실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존감, 자존감’ 자꾸 입 밖으로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꺼내 놓으니 중요한가보다 생각하는 것이지, 자존감이 중요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애 혼내지 마세요. 자존감 낮아져요.’ MZ 부모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웃기지 않은가. 애를 혼낸다고 자존감이 낮아진다니. 잘못을 혼내서 낮아질 자존감이라면 애초에 자존감 따위는 챙기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지켜지는 자존감 따위는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자존감이 화두인 시대에 자존감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존감을 이끌어주는 포인트를 찾아야 하는데, 이 자존감이 나오는 포인트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자녀의 성격과 성향을 잘 관찰하고, 그에 알맞은 행동을 해주는 것이 이 시대 부모들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매일 차타고 언어 치료 다니느라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밤아의 자존감은 어디서 찾고 어떻게 높여줘야 할까? 사실 자존감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감이고 뭐고, 매일 수 십 차례 어휘 틀렸다고 지적하고, 발음 틀렸다고 면박 주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못한 곳에서 아이의 자존감 포인트를 찾아냈고, 그것을 지켜주고, 높여주기 위해 애쓰게 되었다.
6세의 절반이 지나도록 ‘엄마’소리도 못하면서 눈치 코치로 살아왔던 밤아. 심지어 3살이나 어린 동생이 먼저 말을 시작했고, 가끔은 동생이 발음 교정을 해주기도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밤아라고 기분 나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밤아는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절대 책이 좋아서 쉬는 시간에 독서를 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밤아는 책 속으로 숨어버렸던 것이었다. 친구들 사이에 끼지 못해서 민망한 10분의 쉬는 시간이 아이에게 얼마나 길었으면, 좋아하지도 않는 책 속으로 숨어버렸을까 싶다. 그러나 매사에 눈치보고, 자신감 없이 쪼그라들던 수년의 시간을 뒤집어버릴 만한 매개체가 밤아에게도 드디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만화 그리기’였다.
처음에는 ‘만화 그리기’도 독서처럼 숨어버렸던 시간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밤아의 그림을 구경하러 오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친구들이 밤아의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신기하다며, 나도 그려달라며, 이거 어떻게 그리냐며 관심을 가져왔고, 쉬는 시간에 ‘혼자’ 그리는 그림이 아닌 ‘소통’의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시기 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그리스 로마신화’에는 정말 다양한 인물들과 동물, 그리고 칼과 창 등의 많은 무기들이 등장한다. 다소 자극적일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좋아하고, 도서관에서 WHY 시리즈 만큼이나 인기 있는 도서이다. 밤아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말’을 정말 생동감 넘치게 그려냈고, 제우스와 포세이돈도 멋지게 그려내니, 아이들이 밤아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옆에서 따라 그리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고, 친구들과 소통의 장이 열리니 밤아의 학교 가는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연극 포스터 그리는 일이나, 학급 환경 미화, 개인 사물함에 이름 꾸미기 등 교실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업무들을 밤아가 맡게 되었고, 그것들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면서 소속감과 안정감, 책임감 등 많은 긍정적인 감정들을 느꼈던 것 같다.
밤아의 자존감은 이렇게 그의 재능으로부터 나왔다. 그 누구도 걱정의 눈빛으로만 바라봤지, “우리 밤아 잘 한다”며 칭찬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던, 그리고 칭찬을 해도 알아듣지 못했던 시기를 감내하며 성장한 밤아에게 칭찬과 부러움과 동경의 눈빛은 밤아를 살아 숨쉬게 했다. 밤아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 주었고, 자유로이 날 수 있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