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아가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방학식을 하고 온 날, 우연히 밤아의 책가방 속에서 충격적인 받아쓰기 시험지를 발견했다.
성적: 10점.
‘아, 내가 언어 치료에만 치중하느라 아이 공부에 너무 신경을 못 썼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다른 아이들은 공부를 ‘못’해서, 또는 공부를 ‘안’ 해서 받아쓰기 감점이 나오는 것이고, 밤아는 ‘장애’ 때문에 받아쓰기를 못 한다고 할 수 있겠구나. 모든 것의 원인은 장애로 귀결되는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 이겨내려면 밤아가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깨달음일 뿐, 아무도 이렇게 말한 적 없다. 어쩌면 장애아들을 둔 엄마의 피해의식에서 나온 자기 방어적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분히 현실화 될 가능성이 있는 생각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자, 깨달았으니, 이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학원에 보내봤자 넓고 울리고 소음 많은 공간에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인공 와우의 물리적인 한계가 따르고, 듣기 환경을 개선한다고 할지라도 밤아의 재활 수준으로 봤을 때 약 80% 이상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수용언어의 한계) 굉장히 사실적인 판단이 섰다. 그래서 집에서 해보자는 마음으로 구몬학습 선생님을 불러서 20만원이 넘게 여러 과목을 신청했다.
주1회 10분 코칭 방문 학습지로 봤을 때 20만원이면 정말 큰 금액이다. 그러나 뭔가 해보겠다는 나의 다짐에 비해 밤아의 협조가 너무 저조했다. 일단 숙제를 전혀 안 했다. 강제로 시켜도 안 했다. (생각해보니 구몬으로 초등 시절을 보낸 나도 몰래 답지를 베껴서 숙제를 완료했다.) 구몬 선생님이 오셔서 지도해주시는 그 시간마저도 집중을 잘 못했다. 그리고 너무 여러 과목을 신청한 까닭에 구몬 선생님은 10분씩 여러 과목이 모여 한 시간이 넘도록 과외선생님처럼 우리 집에 머무셨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어렵게 선생님께 죄송한 말씀을 드리고 학습지를 중단했다.
구몬학습으로 거액을 쓰고 공부는 제대로 못한 안타까운 2학년 2학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3학년은 좀 더 어려운 내용이 나올 텐데, 짬을 내어 영풍문고와 교보문고를 방문했다. 너무 많은 문제집과 각종 교재들은 나를 정보의 홍수로 빠뜨리기에게 충분했다.
“애기 몇 학년이에요? 정말 좋은 교육 프로그램 한 번 해보세요. 요즘 이거 안 하는 초등학생 없어요.”
팝업 형식으로 영업 나오신 직원분이 내 구미를 당기는 말씀을 걸어오셨다. 일주일 무료 체험의 기회도 주고, 선물도 주신단다. 교육에 목마른 내게 꿀 같은 유혹이었다. 일단 무료 체험을 신청했고 ‘아이스크림 홈런’을 사용해봤다. 다양한 콘텐츠도 마음에 들고, 강의 스타일이나 학습 문제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교적 큰 금액이 약정으로 들어가야 하고, 패드가 굉장히 두껍고 크고 무겁다는 단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약정 금액이 계속 들어가는데, 구몬학습처럼 아이가 협조를 안 하면 아무리 좋은 콘텐츠여도 쓸 모 없을 것이다. 일주일 체험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고, 미련 없이 기기를 반납했다.
방문 학습지 중단, 유료 교육 콘텐츠 무료 체험 후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EBS였다. 공적으로 해주는 교육 서비스인 만큼 양질의 콘텐츠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 일단 아이의 비협조 때문에 생기는 금액적인 리스크는 없을 것이다. 일단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관련 교재를 먼저 구입했다. 이렇게 입문하게 된 ‘EBS 만점왕 전과목 시리즈’는 우리에게 구세주가 되었다.
EBS 교육방송은 나도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 ‘탐구생활’ 과제를 하기 위해 종종 시청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요즘 교육방송은 정말이지 셀 수 없이 많은 콘텐츠들을 담고 있어서 선택의 어려움에 빠지기 충분했다. 국/영/수/과/사 주요 과목은 난이도 별로 나뉘어 있고, 한자, 역사, 과학 실험, 사자성어, 속담, 문해력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잘만 활용하면 그 어떤 유료 콘텐츠보다 훨씬 의미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콘텐츠를 시청하기보다는 일단 EBS 만점왕 교재를 가지고 엄마의 목소리로 아이와 함께 공부하고 싶었다. 교육방송 아무리 보여줘도 아이가 흡수를 못하면 그 또한 시간 낭비일 뿐, 그리고 인공 와우가 태블릿에서 나오는 전자 소리를 얼마나 아이에게 전달해 줄지도 사실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해주지 못하는 ‘과학 교과서 실험’ 부분만 교육방송에서 따로 찾아서 보여주고, 나머지 부분은 엄마가 직접 과외 선생님이 되어 보기로 했다.
1. 밤아가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얼마나 듣고 이해하는지 모른다. (받아쓰기 10점으로 이미 증명했다.)
2. 조금이라도 알고 학교에 가야 아는 만큼 들을 수 있다. (영어단어도 알아야 들리는 것처럼)
3. 예습을 해야 자신감 있게 수업에 임할 수 있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남들처럼 손들고 발표했다가 무안했던 경험을 하는 것을 학부모 참관 수업 때 많이 보았다.)
4. 청각장애 어린이 전문 과외 교사를 찾기 힘들다. 심지어 초등 3학년 내용은 나도 할 수 있을 만큼 어렵지 않기 때문에 괜한 돈을 쓸 필요가 없다.
5. 태블릿 등으로 시청하는 교육방송은 밤아에게 시각적인 자극만 있을 뿐 간과되는 중요한 내용이 많을 것이다. (잘 듣고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유들은 나에게 내 모든 상황과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 교육에 매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기에 충분했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으며, 당장 움직이자는 추진력에 불을 지피게 되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도 있고, 가족끼리 뭐 가르치는 거 아니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한 번 도전해보자. 엄마만큼 내 아이에게 안성맞춤인 선생님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