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8회 이상의 많은 재활치료 양에 비해 생각보다 더딘 성과와 밤아의 지루해하는 모습. 밤아는 밤아 대로 힘들고 엄마인 나는 밤아의 나이가 있으니 빠른 재활을 기다리는 마음에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밀려오는 현기증에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아를 출산하면서 강제 중단됐던 나의 학업, 교육대학원 재학 시절 교수학습 지도안도 만들고, 교재 연구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밤아를 위한 언어치료 교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손재주가 전혀 없는 엄마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집에서 안 쓰는 스프링 노트를 찾아서 어휘집을 만들까 했더니, 아차, 밤아는 한글을 아직 몰랐다. ‘한글 없는 어휘집’을 만들어야 했다. 집에 있는 은박지 호일을 찾아서 반짝거리는 면이 눈에 보이도록 작은 타원 모양으로 오렸다. 그리고 노트에 붙인 후 호일의 테두리를 색연필로 꾸몄더니 제법 ‘거울’ 같아 보였다. 정말 거울처럼 생긴, '거울'이라는 어휘와 이미지 자료의 매칭이었다. 이렇게 밤아만의 어휘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어휘집이 소화하지 못하는 감각적 단어들은 실물을 이용해서 알려줬다. 예를 들어, 털실을 평평하게 돌돌 말아 붙인 후 부드럽다는 표현을, 수세미 조각을 노트에 붙이고 까끌하다는 촉각적 표현도 알려줬다. 설탕을 찍어먹게 한 후 ‘설탕’과 ‘달콤하다’는 표현을 알려줬고, 소금은 짜다는 미각적 표현도 알게 했다.
하지만 이런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표현보다 ‘친절하다’ 같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는 설명하는 나와 선생님도, 배우는 밤아도 참 어려웠다. 그리고 수많은 단어들을 내가 일일이 만들어가며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밤아도, 나도 현실의 벽에 부딪힘을 느꼈다.
결국 재활 선생님 중 마음이 좀 맞는 한 분께 상담을 요청하여 현재 밤아가 재활 시간을 어떻게 느끼는지, 그리고 내가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솔직하게 털어놓고, 재활 방법의 변화를 요구했다. 진작에 그렇게 할 걸. 생각보다 선생님은 열린 마음으로 들어 주셨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주셨다. 나도 생각나는 좋은 방법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께 말씀드리기를 수 차례, 드디어 해답까지는 아니지만, 적절한, 어쩌면 최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방법을 찾았다.
현재 밤아의 인지적 연령과 실제 나이에 많은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재활에 있어 가장 큰 방해가 되었으니(6세에 비해 인지적으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실제 나이에 맞게 한글을 먼저 가르쳐보자는 것이 재활 선생님의 의견이었다.
MZ 세대가 부모가 된 지금, 한글 교육을 바라보는 교육관이 과거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물론 교육관에 MZ세대를 연관 짓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지만, 요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영어랑 함께 이중 언어로 한글을 가르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한글을 통글자로 가르친다. ‘버스’를 ㅂ과 ㅓ의 결합, ㅅ과 ㅡ의 결합이 아닌, ‘버스’라는 그림 같은 통글자, 이미지로 가르치기 때문에, 이렇게 학습한 아이는 ‘버스’의 ‘스’는 알아도 ‘오예스’의 ‘스’는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단점이 있다. 똘똘한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익히는 경우가 사실 많기도 하다. 나는 옛날 방식으로, 자음과 모음을 알게 한 후 글자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리 밤아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한글 공부를 하기로 했다. 물론 자음과 모음의 조합은 아니다.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들을 제공하고, 그림처럼 이미지로 익히게 하려는 의도가 큰 작전이었다. 우선, 교통수단을 좋아하는 밤아를 위해 지하철 노선도를 크게 출력했다. 보라색 5호선 우리집 행당역부터 광화문 언어 치료 센터까지 지나가는 역들을 한글로 보고, 한 글자씩 읽는 연습을 했다.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돼지저금통에 코인 넣는 것보다 훨씬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더 좋아했던 것은 포켓몬 카드. 해가 갈수록 자꾸만 진화해서 캐릭터가 무한으로 증식하는 포켓몬 때문에 많은 엄마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겠지만, 적어도 밤아에게 만큼은 최적의 도움을 주는 포켓몬 카드를 나는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포켓몬 카드에 적힌 캐릭터의 이름은 아주 생소해서 발음도 어렵고 외우기도 어렵지만, 밤아가 발음을 연습하고 한글을 익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밤아와 함께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포켓몬 카드를 구매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매일같이 카드를 구입해서 언어 치료 센터에 갈 때마다 애지중지 챙겨 갔다.
이렇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할 수 있는 언어 치료의 접근 방법이 많아지니 밤아의 어휘가 늘기 시작했고, 발음도 좋아졌다. ‘엄마, 우유 주세요.’라고 3단어 조합도 가능해졌고, 아직 표현 언어는 부족해도 수용 언어가 좋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밤아가 엄마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밤아와 나 사이에 하루에도 수십 번 발생했던 크고 작은 갈등들이 눈에 띄게 없어졌고, 밤아의 짜증 섞인 울음도 거의 없어진 느낌이었다. 이렇게 재활을 하다 보면 어쩌면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초등학교에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