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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람 Aug 27. 2024

인생 제 2막

 힘들게 결정한 인공 와우 수술을 받은 그 날 밤, 나는 캔맥주 2개를 사서 병실로 들어왔다.     


 “어머, 밤아 엄마. 여기에서 술 마시면 안 돼요.”     


 ‘병실에서 술 마시면 당연히 안 되겠죠. 하지만, 이거 없이는 제가 죽을 것 같아요. 사람 하나 살린다는 마음으로 한 번만 눈 감아 주세요.’ 라고 생각하며 6인실 베드 위의 커텐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밤아는 약이 아직 안 깼는지 배고픈 것도 모르고 그냥 계속 잤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밥 하루 굶는다고 큰 일 안 난다. 너는 자고, 나는 맥주라도 마셔보자. 원래 술을 좋아하던 나였지만, 그 날만큼은 밥맛도 없더니 술맛도 없었다. 심지어 달랑 2캔뿐인 캔맥주 중 한 캔은 손도 안 댔다.       


 아침이 되었다. 밤아에게 병원에서 나오는 미음을 줬지만, 죽 종류를 안 좋아하는 밤아는 먹지를 않았다. 배고파도 죽은 안 넘어가나보다.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와 빵을 사와서 먹이려는데, 귀 뒤를 수술했으니 입 벌릴 때 뼈가 아팠나보다.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입을 벌리지 못했다. 그래서 빨대를 구해다가 바나나우유만 겨우 먹였다. 그리고 밤아를 휠체어에 태워 임플란트 이식이 잘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도 찍고, 진료도 받고 상담도 받았다.      


 “밤아가 이제 막 수술을 받았고, 와우기기를 외부에 부착하려면 4주는 더 기다려야 해요. 4주 후에 와우 외부장치 받아서 첫 맵핑(기기에 소리를 넣고 조절해주는 작업) 받아도 엄마가 느끼기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거예요. 소리는 소리의 유무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미세한 자극부터 천천히 들어가요. 정상적인 음운 분별이 되기까지는 반년에서 1년은 걸릴 테니까 조급한 마음 갖지 마세요. 일찍 수술했다면 재활이 잘 될 경우 건청인들과 비슷하게 말을 할 수 있지만, 밤아는 너무 늦게 수술했기 때문에 재활을 잘 해도 예를 들면 해외 교포들이 한국어 더듬더듬 하는 정도로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지금 일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봤자 밤아에게 도움 될 만한 것들이 없어요. 당장 농학교 유치원으로 옮겨서 집중 케어 받게 하세요.”     


 의사 선생님과 언어평가 선생님의 ‘뼈를 때리는’ 상담은 엄마인 나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가슴이 아프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객관적인 눈으로 나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도록 아주 ‘약간의’ 강인한 마음이 생겼다. 그 강인한 마음으로 의료진이 권유한 ‘농학교유치원’은 후순위로 놓기로 했다. 일단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익숙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친구들의 소리를 듣게 하고 싶었고, 재활에 한계가 있어도 아이의 잠재적 능력을 믿어보고 싶었다.      


 퇴원 후 인공 와우 외부 장치를 받기까지 4주의 시간은 내 생애 가장 길고 긴 시간이었다. 인공 와우 수술을 받기 전 5년의 시간도 너무 길고 힘들었는데, 수술 후 첫 기기 착용까지의 4주는 길었던 5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수술을 안 했으면 몰라도, 이왕 수술을 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기기를 착용해서 엄마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병원에 전화해서 수술 부위가 아문 것 같다, 일주일만 빨리 해주면 안 되냐 등 많은 문의를 했지만, 대학병원 스케줄 상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길고 긴 시간이 힘겹게 지났고 약속된 날짜가 되어 병원에 가서 첫맵핑을 받았다. 인공 와우 회사의 직원이 나와서 기기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해주셨고, 그 기기를 머리에 부착한 후 소리를 넣었다. 인터넷에서 보면 ‘생애 처음 엄마 목소리를 들은 아이의 모습’, ‘보청기를 처음 착용한 아이의 반응’ 등 다양한 제목들의 청각장애 아이들에 관한 영상들이 있다. 나는 우리 밤아가 소리를 처음 들으면 눈이 똥그래지고, 놀라서 또는 감격해서 울 줄 알았다. 심지어 내 동생은 밤아의 소리 첫반응을 영상으로 남기겠다며 맵핑 선생님의 양해까지 구했다. 하지만 밤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저 외부 장치를 손으로 떼서 던져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밤아도 무언가 눈치를 챈 것 같다. 평소 같으면 머리에 모자만 씌워줘도 던지고 싫어하는데, 머리 양쪽으로 낯선 인공 와우 외부장치를 붙였는데도 떼려는 시도를 전혀 안 했다. 5살 어린 아기가 본인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인공 와우와의 인생 제 2막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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