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만 하면 바로 듣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바보같은 상상은 애초에 하지도 말아야 한다. 아무리 병원에서 수술 후 발화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미리 말을 해줘도, 곧 말 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많은 엄마들이 그렇겠지만, 아이가 와우를 착용하면 바로 “엄마”라고 할 것 같다. 나도 그랬다. 수술 후 6개월이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는 밤아를 보면서 ‘수술이 잘못 되었나?’, ‘부작용 아니야?’ 등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인공와우는 소리를 들려주는 기기이지, 말하게 하는 기기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재활의 양이 차야 비로소 발화가 나온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으니 너무 실망스러웠지만, 그저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첫 맵핑 후 1주마다, 2주마다, 4주마다, 이렇게 주기를 늘려가며 서울대병원에 가서 와우 외부장치의 소리를 조절했고, 거의 매일 청각장애인복지관에 가서 청능 치료와 언어 치료를 받았다. 나는 날마다 운전하며 돌아다니느라 서울 시내 도로는 꽉 잡고 있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가고 있었다.
밤아는 매일 어린이집에서 점심 식사까지만 하고 하원했다. 밥 먹으러 어린이집에 다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점심만 먹고 친구들에게 방해 안 되게 살짝 하원했다. 그리고 바로 주 3회는 광화문에 있는 언어 치료 센터로, 주 3회는 선정릉에 있는 청음복지관으로 향했다. 또 주 2회는 군자역에 있는 발달센터에 가서 감각통합수업과 음악 치료를 받았다. 어떤 날은 재활 한 번만 받고 집에 오지만, 어떤 날은 군자 찍고 선정릉 찍고 저녁에 돌아오기도 했다. 가끔 토요일에 재활하는 친구가 결석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주말이지만 센터에 가서 언어 치료를 받았다. 6세인데 말을 못하는 밤아에게 이런 스케줄은 고된 일정이었겠지만, 안 할 수 없는 너무 중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동료 엄마들과 커피숍에 모여 커피 한 잔 하며 오순도순 수다 떠는 엄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저들 사이에 끼어 함께 담소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내 내 처지를 깨닫고 아이에게 집중했다.
재활로 바쁜 와중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밤아의 나이는 6세, 그러나 소리의 유무를 파악하는 일부터 ‘아, 에, 이, 오, 우’ 같은 모음과 ‘Ling Six’라는 특정 주파수 영역을 대표하는 소리를 익히는 것이 어쩌면 너무 시시해서 재미없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너무 중요하지만 어려워서 못하는 일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애매’했다. 그리고 돌 쯤에 수술 받은 어린 아가들에게 진행되는 언어 치료를 밤아에게 적용하려니 지금 연령에 맞는 6세 정도의 생활 나이와 아무 것도 학습되지 않은 0세 정도의 인지 나이가 맞지 않아 적당한 치료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면, 소리가 들리면 돼지 저금통에 코인을 넣는 행위 자체가 어린 아가들에게는 코인을 넣어보고 싶다는 동기도 되고 즐거운 일이겠지만, 이미 ‘터닝메카드’, ‘포켓몬’이 좋은 6세 형아에게 돼지 저금통은 너무 시시한 놀이인 것이 당연했다. 연령별 인지 수준에 맞게 고안된 언어 치료 방법이 따로 없다는 현실, 어쩌면 아이의 연령에 맞게 언어 치료 방법이 준비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조심스로운 발언이지만) 현실이 답답했다.
선생님의 재활 계획에 밤아가 따라주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도 꽤 있었다. 광화문 언어 치료 센터에서는 울면서 문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고, 복지관에서는 선생님과 싸우다가 밤아가 교실 문을 잠가버리기도 했다. 말도 안 통하고, 혼내도 혼나는 의미를 모르니 답답했다.
그렇게 힘들게 언어 치료를 받으며 수술 후 약 6개월 이상이 지난 어느 날, 밤아 입에서 첫 단어가 튀어나왔다.
“브..애..이”
누가 들으면 저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나는 안다, ‘브애이’가 무엇인지. ‘엄마’소리를 제일 먼저 할 것이라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브애이’가 먼저 발화되었다고 해서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터져 나오기만 하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브애이’는 ‘비행기’였다. 6세 나이의 남자 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비행기! 우리 밤아는 비행기에 대해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밤아는 비행기 그림을 정말 심혈을 기울여 그렸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종이비행기를 꼭짓점 딱딱 맞추어 접었으며, 비행기를 타면 창 밖 쳐다보느라 잠 한 숨 안 자던 우리 밤아가 ‘브애이’를 제일 먼저 외쳤다.
그리고 며칠 후, 너무나도 듣고 싶었지만 동생이 먼저 불러 주었던 ‘엄마’ 소리를 들었고, ‘아빠’도 불렀다.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생각했던 많은 단어들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그렇게 나는 큰아들을 출산하고 ‘6년 반’ 만에 ‘그의 엄마’가 되었다. 슬프고도 감사했다.